- 주소
-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 60-4
- 탐방로그
- 권흥규 선생 순열비는 정산면 행복복지센터 정면 오른쪽 입구에 위치해있다. 입구로 들어가면 정산 3.1만세운동 기념탑이 있다. 권흥규 선생의 사적을 모두 방문하기 위한 코스로는, 권흥규선생 순열비 > 권흥규 추모비 > 권흥규의 묘 순으로 방문하는 것을 추천하며,총 거리는 12.1km로, 차량을 이용할 시 22분 정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 기미의사 권흥규선생 순열비 ]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이 기념비는 기미년 정산만세운동 당시 일본 헌병의 총을 맞고 순국하신 권흥규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96년 청양군에서 건립했다. 선생은 청양 출신으로 1919년 청양군 목면 안심리에 거주하면서 정산향교 직원으로 있었다. 이 해 4월 5일 정산 장날 오후 3시경 1백여 명의 장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하였는데 일제 헌병이 이 중 30명을 강제 연행하자 7백여명으로 늘어난 시위 군중은 격노하여 헌병주재소에 몰려가 검거된 사람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제 헌병의 발포로 인하여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그의 장례식 때 더욱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을 벌였고 이날부터 연 사흘간의 의거로 붙잡혀 태형을 받은 사람만도 166명에 이른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 기념비는 기미년 정산만세운동 당시 일본 헌병의 총을 맞고 순국하신 권흥규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96년 청양군에서 건립했다. 선생은 청양 출신으로 1919년 청양군 목면 안심리에 거주하면서 정산향교 직원으로 있었다. 이 해 4월 5일 정산 장날 오후 3시경 1백여 명의 장꾼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하였는데 일제 헌병이 이 중 30명을 강제 연행하자 7백여명으로 늘어난 시위 군중은 격노하여 헌병주재소에 몰려가 검거된 사람을 석방하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제 헌병의 발포로 인하여 그 자리에서 순국하였다. 이에 격분한 군중은 그의 장례식 때 더욱 격렬한 만세시위운동을 벌였고 이날부터 연 사흘간의 의거로 붙잡혀 태형을 받은 사람만도 166명에 이른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기미 의사 권흥규 선생 순열비
기미의사 권흥규선생 순열비문
선생은 관향이 안동이요 이름은 흥규이니 습재 권공 벽의 후손 사형의 아들로 고종왕 경신년에 태어나시어 청양군 목면 산심리에서 사시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문학에 능숙하였으며 정산 문묘 직원을 지내시다. 서기 1919년 삼일독립운동때에 비장한 결심을 품으시고 음력 삼월 오일 정산시장으로 달려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시니 추종하는이 많았다. 이에 선생은 군중을 이끌고 일본헌병 파견소에 나아가 큰소리로 우리나라는 우리가 다스려야 할것이니 너희들은 즉시 물러가라고 항의하셨다. 일본 헌병들은 공포를 쏘았으나 선생은 더욱 분기하여 항쟁하시니 또 일본헌병들이 총을 연발하므로 헌병은 선생은 가슴을 헤치고 달려들어 마침내 실탄에 맞아 쓰러지셨으니 당년 육십세이셨다. 이날 밤은 유달리 비가 많이 왔다고 한다. 다음날 영구가 집으로 돌아갈때 이웃 여러 마을에서 각각 상여를 갖추어 따르며 곳곳에서 제전을 베프니 횃불이 십 오리에 뻗히였다. 밤에 멀리 공주에서도 일본 헌병들이 몰려와 난사하여 선생의 질녀와 최봉안, 유행길, 강응렬, 윤광원, 김국상등은 쓰러지고 선생의 따님은 적의 칼날을 앗아잡아 세 손가락이 끊어지고 몸에 총알의 관통상을 입었다. 그 다음날 선생을 안심리 여우고개에 장사할때 개인 날씨에 뇌성병력이 일어나
선생은 관향이 안동이요 이름은 흥규이니 습재 권공 벽의 후손 사형의 아들로 고종왕 경신년에 태어나시어 청양군 목면 산심리에서 사시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문학에 능숙하였으며 정산 문묘 직원을 지내시다. 서기 1919년 삼일독립운동때에 비장한 결심을 품으시고 음력 삼월 오일 정산시장으로 달려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시니 추종하는이 많았다. 이에 선생은 군중을 이끌고 일본헌병 파견소에 나아가 큰소리로 우리나라는 우리가 다스려야 할것이니 너희들은 즉시 물러가라고 항의하셨다. 일본 헌병들은 공포를 쏘았으나 선생은 더욱 분기하여 항쟁하시니 또 일본헌병들이 총을 연발하므로 헌병은 선생은 가슴을 헤치고 달려들어 마침내 실탄에 맞아 쓰러지셨으니 당년 육십세이셨다. 이날 밤은 유달리 비가 많이 왔다고 한다. 다음날 영구가 집으로 돌아갈때 이웃 여러 마을에서 각각 상여를 갖추어 따르며 곳곳에서 제전을 베프니 횃불이 십 오리에 뻗히였다. 밤에 멀리 공주에서도 일본 헌병들이 몰려와 난사하여 선생의 질녀와 최봉안, 유행길, 강응렬, 윤광원, 김국상등은 쓰러지고 선생의 따님은 적의 칼날을 앗아잡아 세 손가락이 끊어지고 몸에 총알의 관통상을 입었다. 그 다음날 선생을 안심리 여우고개에 장사할때 개인 날씨에 뇌성병력이 일어나
장례가 소 하였다. 이틀후 선생의 일가 영진씨는 체포되어 살해당하니 그는 태극기를 만들고 매일 사라는 명정을 쓴 까닭이라. 이어 잡가 징역당한 이는 홍범섭, 홍세표, 임이재, 박상종, 윤석희 오인이요 태형당한 이는 166인이다.
그후 서기 1953년에 정향 조병호씨가 정산중학교장 김창한씨와 상의하여 순열한 곳에 돌을 세워 다만 기미의사 권공 흥규 순열비라 새기어 매년 삼일행사를 이 앞에서 행하여 왔으니 현 중학교 교정이다. 이제 다시 뜻있는 인사들과 의론하여 묘소에 석물을 갖추며 제답을 마련하고 다시 또 이비를 세워 후진에게 전하여 널리 알리노라.
그후 서기 1953년에 정향 조병호씨가 정산중학교장 김창한씨와 상의하여 순열한 곳에 돌을 세워 다만 기미의사 권공 흥규 순열비라 새기어 매년 삼일행사를 이 앞에서 행하여 왔으니 현 중학교 교정이다. 이제 다시 뜻있는 인사들과 의론하여 묘소에 석물을 갖추며 제답을 마련하고 다시 또 이비를 세워 후진에게 전하여 널리 알리노라.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 60-4에 있는 정산면 행복복지센터를 찾아왔다.
행정복지센터 정면의 두 입구 중, 오른쪽 입구에 권흥규 선생의 순열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