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

4

주소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732-18
탐방로그
양주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를 찾기 위해 경기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732-18에 왔다. 해당 사적은 가래비어린이공원에 위치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양주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
양주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
양주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한 일본제국주의는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한국을 반식민지로 만들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일제가 우리의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자 한민족은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의병전쟁을 일으켰으나 일제는 이를 잔인하게 토벌하여 진압시켰다. 일제를 우리나라로부터 축출하기 위하여 의병장인 안중근은 마침내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오 히루부미를 사살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제국주의는 1910년 한국을 강제로 점령하여 조선총독부를 설치할고 데라우찌를 총독으로 임명하여 헌병 경찰에 의한 무단통치를 감행하였다. 우리 민족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해외인 만주 중국 러시아의 연해주 미주 등지로 망명하였고 일부는 국내에서 악조건을 무릅쓰고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전쟁 등 여러 갈래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도 국내외에서 다양한 항일투쟁이 진행되었다. 먼저 국내에서 이루어진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상황을 살펴보면 신민회의 105인사건 독립의군부 국권회복운동 최기중의 풍기광복단 국권회복운동 조선국민회 국권회복운동 대한광복회 국권회복운동 이관구의 국권회복운동 청림교 국권회복운동 민단조합 국권회복운동 박현대 독립단의 활동 등이 있었다. 국외에서는 미주의 해스딩스 한인소년병학교 죽국의 동재사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대한광복군정부, 히와이대 조선국민군단 하와이개 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 미국의 대한국민회 뉴욕 세계약소민족회의에서의 독립호소 만주에서의 무오독립선언 일본 동경에서의 2.8독립선언 신한청년단에 의한 파리평화회의에서의 독립호소 등의 활동이 펼쳐졌다. 이와같은 활동들이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한편 일제의 무단통치하에 조선인의 탄압상황은 매우 심각하였다. 1911년 하루평균 수감자가 9.500여 명이었고 1918년에는 12,000명이 넘었다. 이 수치만 보아도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잔인했는가를 잘 알 수 있으며 우리 민족의 고충이 말할 수 없을 정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의 잔인한 무단정치에 굴하지 않고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이 전개되고 있을 무렵 미국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하였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 안에서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이 독립하였고 러시아 지배하에서 폴란드 에스토니아 폴란드 에스토니아 핀란드 리투아니아 등이 독립하였다. 이는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소식이 국내에도 전파되자 일제에 대한 한민족의 저항이 절정에 달한 때에 민족
대표 33인이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3.1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에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평화적인 시위가 전개되었고 이는 곧 일제의 탄압으로 투쟁적인 시위로 전환되었다. 3.1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전개되어 전국적으로 참가자가 200만을 넘었고 집회 횟수가 1,500회를 상회하였으며 211개의 시,군이 참가하였다. 거국적으로 3.1독립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1919년 3월 28일 양주군 광적면 가래비에서도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수많은 애국적인 광적면민을 중심으로 이웃 면민까지 950여 명이 운집하였고 백남식 이용화 김성진 지사등이 생명을 걸고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에 놀란 일제 관헌은 평화적인 가래비 만세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며 백남식 이용화 김성진 지사는 일본 헌병의 총탄에 순국하였다. 양주군민들은 이러한 포학하고 잔인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또다시 4월 3일에 1,400여 명이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와같은 가래비3.1운동은 임진왜란 당시 신각 장군의 왜군섬멸 그리고 한말의병장 윤인순, 정용대 강기동 등의 위대한 항일애족정신을 계승한 결과였다. 양주지역의 3.1운동에는 총 8천명이상이 참가하였으며 이 운동으로 인하여 양주군 화도면 5명, 광적면 3명 주내면 2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와부면에서는 2명 장흥면에서도 3명의 부상자가 생겼다. 경기도에서의 만세운동은 양주군과 비슷하게 3월 하순에서 4월초 경에 일어났는데 일본 관헌의 투쟁 횟수가 70여 회에 달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망자가 104명 부상자가 190명에 달하였으며 약 3,000여 명이 체포될 정도로 그 희생이 매우 컸다. 가래비3.1독립운동과 나아가 전국적인 3.1독립운동의 민족사적 의의는 하나로 뭉친 민족과 민주국가 탄생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본제국주의를 축출하기 위하여 남녀노소 신분 차별 직업의 귀천 없이 온 민족이 거족적으로 하나가 되어 3.1독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는 국내외에서의 항일독립전쟁 등 여러가지 방법과 책략으로 민족독립운동을 펼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같은 결과 왕정을 지지하는 복벽주의가 민주공화정체로 전환됨으로써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3.1독립정신으로 근대적인 민주국가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단기 4339년(서기 2006년) 12월 일
전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건국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박영석 지음
전 대한민국 현대미술대전 심사위원장 한국 현대서예 연구원장 근당 양택동 씀
후기문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려고 온 민족이 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시위를 벌인 3.1운동은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시작하여 점차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우리 고장에서도 여러 독립지사들의 주도로 3월 18일 광적면과 남면 및 양주 일대 주민 950여 명이 광적면 가납리 732번지 14호(지금은 동소 40호 41호)일대의 논에서 일본 헌병들과 충돌하여 이때 주도하던 애국지사 백남식 이용화 김진성이 저 야만적인 왜병의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고 4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비극이 있었다.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 고장에서는 다시 4월 3일 1,400여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계속했다. 이러한 우리 고장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애국정신을 널리 알리고 길이 본받기 위해 3.1운동에 동참했던 백인현옹의 발의와 추진회장 및 지역 제현 여러분들의 뜻이 합하여 1985년 4월 9일부터 기념비 건립을 추진했다. 원래는 기념비를 만세배미(萬歲沓)에 세우려 했으나 터를 확보할 수 없어서 가납리 709번지에 하천부지를 매립하여 1986년 6월 18일 가래비삼일운동기념비를 세웠다. 그 뒤 기념비 보존위원회가 구성되고 매년 3.1절 기념행사를 거행하여 3.1운동의 애국정신을 선양했다. 마침내 가래비 만세배미가 공원지역이 되어 이 유적지를 되살리고자 서기 2004년에 순국기념사업회를 발족하여 조태훈 회장의 열의와 권영환 박상익 이안교 이종규 이채용 정용철 등이 이 현장의 정의로운 역사를 보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는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피흘리고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거룩한 뜻을 받들고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고자 양주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 건립을 주선하게 된 것이다. 이를 위하여 양주시장의 각별한 협조와 이 지역에 도의원 시의원에 협력 및 각지역 유지인 김정식 박경남 박성복 유영도 윤지혁 조병갑 조선영 채수갑 최준원 허진행 등의 헌신적인 노력과 국내 제현 여러분의 성원이 있었으며 양주시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우리 모두가 순국선열들의 애국정신을 되살리고 후세 교육에 도장으로 승화시키어 국력 신장에 이바지하고자 함이다.
단기 4340년(서기 2007년) 5월 한국고전문화연구원 연구위워 서종태 지음
조형물 규모 비신폭 1.1m 높이 6m 총공사비 2억 8천만원 공원면적 1.546㎡ 봉화 1.2m 1.5m 시지원 2억 5천만원 비지단 225㎡ 병풍석 10m 2.5m 제현성금 3천만원 좌대폭 4.1m 높이 2.5m 기공 2006.9.28. 준공 2007.5.
지역제현 헌성록
獨立宣言書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半萬年 歷史의 權威를 仗하야 此를 宣言함이며 二千萬 民衆의 誠忠을 合하야 此를 佈明함이며 民族의 恒久如一한 自由發展을 爲하야 此를 主張함이며 人類的良心의 發露에 基因한 世界改造의 大機運에 順應幷進하기 爲하야 此를 提起함이니 是 天의 明命이며 時代의 大勢며 全人類 共存同生權의 正當한 發動이라 天下何物이던지 此를 沮止抑制치 못 할지니라. 舊時代의 遺物인 侵略主義 强權主義의 犧牲을 作하야 有史以來 累千年에 처음으로 異民族 箝制의 痛苦를 甞한 지 今에 十年을 過한지라 我 生存權의 剝喪됨이 무릇 幾何며 心靈上 發展의 障礙됨이 무릇 幾何며 民族的 尊榮의 毁損됨이 무릇 幾何며 新銳와 獨創으로써 世界文化의 大潮流에 寄與補裨할 機緣을 遺失함이 무릇 幾何뇨.
噫라 舊來의 抑鬱을 宣暢하려 하면 時下의 苦痛을 擺脫하려 하면 將來의 脅威를 芟除하려 하면 民族的 良心과 國家的 廉義의 壓縮銷殘을 興奮伸張하려 하면 各個人格의 正當한 發達을 遂하려 하면 可憐한 子弟에게 苦恥的 財產을 遺與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의 永久完全한 慶福을 導迎하려 하면 最大急務가 民族的 獨立을 確實케 함이니 二千萬 各個가 人마다 方寸의 刃을 懷하고人類通性과 時代良心이 正義의 軍과 人道의 干戈로써 護援하는 今日 吾人은 進하야 取하매 何强을 挫치 못하랴 退하야 作하매 何志를 展치 못하랴.
丙子修好條規 以來 時時種種의 金石盟約을 食하얏다 하야 日本의 無信을 罪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는 講壇에서 政治家는 實際에서 我 祖宗世業을 植民地視하고 我文化民族을 土昧人遇하야 한갓 征服者의 快를 貪할 뿐이오 我의 久遠한 社會基礎와 卓犖한 民族心理를 無視한다 하야 日本의 少義함을 責하려 안이 하노라. 自己를 策勵하기에 急한 吾人은 他의 怨尤를 暇치 못하노라. 現在를 綢繆하기에 急한 吾人은 宿昔의 懲辨을 暇치 못 하노라. 今日 吾人의 所任은 다만 自己의 建設이 有할 뿐이오 決코 他의 破壞에 在치 안이 하도다. 嚴肅한 良心의 命令으로써 自家의 新運命을 開拓함이오 決코 舊怨과 一時的 感情으로써 他를 嫉逐排斥함이 안이로다. 舊思想 舊勢力에 羈縻된 日本 爲政家의 功名的 犧牲이 된 不自然 又 不合理한 錯誤狀態를 改善匡正하야 自然 又 合理한 正經大原으로 歸還케 함이로다. 當初에 民族的 要求로서 出치 안이한 兩國倂合의 結果가 畢竟 姑息的 威壓과 差別的 不平과 統計數字上 虛飾의 下에서 利害相反한 兩 民族間에 永遠히 和同할 수 업는 怨溝를 去益深造하는 今來實積을 觀하라. 勇明果敢으로써 舊誤를 廓正하고 眞正한 理解와 同情에 基本한 友好的 新局面을 打開함이 彼此間 遠禍召福하는 捷徑임을 明知할 것 안인가. 또 二千萬 含憤蓄怨의 民을 威力으로써 拘束함은 다만 東洋의 永久한 平和를 保障하는 所以가 안일 뿐 안이라 此로 因하야 東洋安危의 主軸인 四億萬 支那人의 日本에 對한 危懼와 猜疑를 갈스록 濃厚케 하야 그 結果로 東洋 全局이 共倒同兦의 悲運을 招致할 것이 明하니 今日 吾人의 朝鮮獨立은 朝鮮人으로 하야금 正當한 生榮을 遂케 하는 同時에 日本으로 하야금 邪路로서 出하야 東洋 支持者인 重責을 全케 하는 것이며 支那로 하야금 夢寐에도 免하지 못하는 不安 恐怖로서 脫出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로 重要한 一部를 삼는 世界平和 人類幸福에 必要한 階段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한 感情上 問題리오.
아아 新天地가 眼前에 展開되도다. 威力의 時代가 去하고 道義의 時代가 來하도다. 過去 全世紀에 鍊磨長養된 人道的 精神이 바야흐로 新文明의 曙光을 人類의 歷史에 投射하기 始하도다. 新春이 世界에 來하야 萬物의 回蘇를 催促하는도다. 凍氷寒雪에 呼吸을 閉蟄한 것이 彼一時의 勢라 하면 和風暖陽에 氣脈을 振舒함은 此一時의 勢니 天地의 復運에 際하고 世界의 變潮를 乘한 吾人은 아모 躊躇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할 것 업도다. 我의 固有한 自由權을 護全하야 生旺의 樂을 飽享할 것이며 我의 自足한 獨創力을 發揮하야 春滿한 大界에 民族的 精華를 結紐할지로다. 吾等이 玆에 奪起하도다 良心이 我와 同存하며 眞理가 我와 幷進하는도다 男女老少 업시 陰鬱한 古巢로서 活潑히 起來하야 萬彙群象으로 더부러 欣快한 復活을 成遂하게 되도다. 千百世 祖靈이 吾等을 陰佑하며 全世界 氣運이 吾等을 外護하나니 着手가 곳 成功이라. 다만 前頭의 光明으로 驀進할 ᄯᅡ름인뎌.
公約三章
一、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 人道、 生存、 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니 오즉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一、最後의 一人ᄭᅡ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一、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야금 어대ᄭᅡ지던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朝鮮建國 四千二百五十二年 三月 一日 朝鮮民族代表
孫秉熙 손병희 吉善宙 길선주 李弼柱 이필주 白龍城 백용성 金完圭 김완규 金秉祚 김병조 金昌俊 김창준 權東鎭 권동진 權秉悳 권병덕 羅龍煥 나용환 羅仁協 나인협 梁旬伯 양전백 梁漢默 양한묵 劉如大 유여대 李甲成 이갑성 李明龍 이명룡 李昇薰 이승훈 李鍾勳 이종훈 李鍾一 이종일 林禮煥 임예환 朴準承 박준승 朴熙道 박희도 朴東完 박동완 申洪植 신홍식 申錫九 신석구 吳世昌 오세창 吳華英 오화영 鄭春洙 정춘수 崔聖模 최성모 崔 麟 최 린 韓龍雲 한용운 洪秉箕 홍병기 洪其兆 홍기조
헌성록
양주시 가래비 어린이공원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
대한민국의 국권회복을 위한 3.1운동과 가래비 만세 배미. 역사가 있는 나라는 반드시 興한다고 한다. 이 자리는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다한 가래비 만세 배미 현장이다.
○ 풍운의 왕조 : 1876년 고종 13년 조일수호조약에서 1907년 헤이그말사사건으로 고종이 양위하기까지의 32년간은 조선왕조 500년을 통해 가장 격심한 국난이였다.
○ 일본의 침략 : 소위 천황 중심의 통일국가로 탈바꿈한 일본은 강제적인 한일수호조약을 시발로 한반도에 진출하여 정처, 경제침략을 계속하다가 급기야 을사보호조약을 강압 조인하는 천인공로할 만행을 저질렀다. 1910년 8월 29일은 500년 조선왕조의 사직(합방조약)이 종이 한장으로 종적을 감춘 날이다.
○ 3.1독립운동 : 1919년 3월 1일 거행된 독립운동은 도립을 (즉각) 쟁취하는 목적에는 실패했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독립운동을 고양시키고 궁극적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기초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 가래비(3.1)만세운동의 비극적인 참상 : 1919년 3월 18일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732-4 답(논배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나라의 주권을 찾고자 '독립만세'를 외치며 항거하는 950여명의 군중들을 향해 일본군이 총탄을 발사한 독립운동으로써 백남식, 이용화, 김진성 등 세 명의 애국지사가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순국하였고, 40여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 일본의 패망과 조국광복 : 제국주의를 부르짖던 일본은 1910년 한일합방, 1931년 만주침략, 1937년 중국침략, 1941년 태평양전쟁을 통해 극동및 아시아 전역에 씻을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서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천황의 육성을 통해 항복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우리 국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뛰쳐나와 조국광복의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 기념비 건립및 3.1절 행사거행 :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 사업회는 가래비 만세운동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1986년 가래비 모퉁이 하천부지에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그 후 20여년간 3.1절 추념식을 거행하며 만세배미의 역사를 되살려 후순들이 잊지 않기를 호소하고 있다. 또한 2003년 3월 1일 광적청년회와 함께 함께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군의 총탄에 순국한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그대로 재현하였는 이 때 부터 가래비 만세배미 3.1절 해젼행사가 해마다 치뤄지고 있다.
○ 가래비3.1운동 순국기념비 건립(2007년) : 가래비 3.1운동순국기념비는 양주시의 공원화 사업으로 당시 만세배미의 현장이었던 곳에 부지를 마련하여 2007년 새롭게 건립하였다. 이곳은 논을 매립한 습지이어서 안전한 공사를 위해 지질 시추 답사를 하였고 지하 23m아래 암반이 있어 콘크리트 말뚝 13개를 막아 기반을 다졌으며 비석이나 병풍석 등은 원석 통판을 사용 제작하였으며 난간석의 모양은 광화문에 있는 고종즉위 40년 칭경기념비전을 참작하여 고전미를 살려 제작하였다.
○ 기념비문 :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의 비문을 근대사를 연구한 전 국사편찬위원장 박영석 박사가 썼는데 조선 왕조 몰락 후 을사보호늑약 등 배경과 동기를 고찰하고 전국적인 3.1운동과 가래비 만세운동 항거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서체는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인 양택동 선생이 직접 쓴 예서체로써 글씨 각자를 수공(손각자)으로 새겼다.
○ 동상과 독립선언서 : 순국지사 백남식 선생(52세), 이용화 선생(43세), 김진성 선생(45세)의 동상을 고증을 통해 흉상으로 제작하였는데 이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것이 최고의 가치이며 제일의 충성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또한 독립선언서는 국권회복을 위한 3.1운동의 당위성과 국가 보위의 의무감을 담겨있다.
○ 추모제향 : 순국선열들의 거룩한 정신을 받들어 이곳에서 매년 3월 18일에 추모제향을 올린다.
○ 가리배 만세배미의 역사가 살아남 : 가래비 만세배미는 3.1운동의 역사를 살리고자 하는 성지로써 양주시의 예산지원과 민간의 성금 협찬으로 설립되었으며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나라를 사랑하고 국가를 수호하는 후세교육의 도장으로 사용되어지기를 바란다.
경기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 732-18 가래비어린이공원의 양주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