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진 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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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청양군 장평면 중추리 523-12
탐방로그
애국지사 김덕진 기적비는 장평면사무소 안에 위치해있다. 김덕진 관련 사적을 모두 보고 싶으면 김덕진의 묘 - 김덕진의 생가 - 김덕진 기적비 순으로 방문하는 것을 추천하며, 총 거리는 4.2km로, 차량으로 7분 정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청양군 장평면 중추리 523-12 장평면사무소 정문 옆 애국지사 낙계 김덕진 선생 사적비를 찾아왔다.
義士 樂溪 金德鎭 先生 事蹟碑(의사 낙계 김덕진 선생 사적비)
義士 樂溪 金德鎭 先生 事蹟碑(의사 낙계 김덕진 선생 사적비)
의사 낙계 김선생 사적비문

천지의 우람찬 기운을 품수하여 이 땅에 태어나 오직 항일구국의 일념으로 고심혈성을 다 바침으로써 그 이름 청사에 기리 남을 분이 있으니 곧 안동 김공 낙계 선생이시다. 선생의 휘는 덕진이요 자는 경명이니 고려때 태사 휘 선평의 후손으로 대대문장 석덕이 끊치지 아니하던 중 부친 휘 익균과 모친 반남 박씨의 장남으로 고종 을축 4월 16일에 정산 낙형제에서 고고의 성을 발하셨다. 천성이 영특조달하시여 8세 입학에 숙사의 독려를 받지 아니해도 문리가 날로 진척되던 중 어려서 양친을 잃고 가세가 자연영체하였으나 간고에 틈만 있으면 오직 학문 탐구에 여념이 없으셨다. 병자년에 왜국이 우리에게 수호조약을 강청하고저 왜장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으로 하여금 수집의 군감을 이끌고 우리나라를 위협하니 조야가 몹시 술렁거렸다. 이때 선생의 나이 12세 하루는 앞마당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땅에다 감옥을 그리고 종이에 인형을 그려 여러 아이들에게 「결박해 옥에 가두라」하고 또 명령하기를 「이놈의 목을 베어라」하니 이것은 바로 흑전(구로다)의 모형이였다. 뉘 이것을 어린이의 행사라 하리요. 보는 이들이 모두 혀를 내둘러 선생의 특이한 기개를 칭탄하였다. 을미년에 적신 윤중 길준의 무리들리 왜적 삼보오루를 끌어들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해 겨울에 주상의 보말을 늑삭하고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선생이 왜적의 이러한 횡포에 통
분한 마음을 억눌을 길이 없던 차 마침 친당 안병찬과 지산 김복한이 홍성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창의토왜의 깃발을 높이 드렀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가던 중 홍성을 못 미쳐 패전의 비보를 듣고 더욱 절치부심 일절의 가사을 불고하고 오직 의거대열에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셨다.을사년 겨울에 왜적이 또 보호조약을 체결하자고 주상을 협박하니 오적 제순 등이 비밀리에 조인해 조약을 성립시켜 주었다. 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 땅을 치며 통곡하기를 「내가 비록 백면서생이지만 국가가 멸망하는 마당에 어찌 기꺼히 신명을 받히지 아니할까부냐」하고 민참형 종식으로 더부러 정재호 박윤식 같은 여러 동지들을 불러모아 구국투쟁을 맹세한 끝에 선생은 추종자를 이끌고 곧바로 달려가 일대격전 끝에 홍성을 탈환하였으나 적세 워낙 창궐하여 선생의 구불고신도 보람없이 끝내는 왜적에게 사로잡혀 공주감옥에 수감되시였다. 이윽고 왜경 고교천수(타카하시 천수)라는 놈이 선생에게 힐문하기를 「어찌해 이런 거조를 꾸몃는고」「왜적을 무찔러 복수를 하려고 꾸몃다」「우리가 너의 나라를 보호하느라고 백방으로 힘을 기우리거늘 왜적이란 말이 무슨 말이냐 선생이 눈을 부릅드고 크게 꾸짓기를 「너의 놈들은 우리에게 불공대천의 원수이다. 임진왜란은 말할 것도 없고 만근 십여년 이래만 보아도 통상을 빙자하하여 우리를 수탈했으며 국모를 시해하고 주상을 능욕하며 범궐을 서슴지 않고 음흉한 모사를 휘둘러 강제로 조약을 체결했으니 우리의 강토와 정령을 송두리채 앗아간 놈들이다. 그 죄악을 논지하면 천참만륙도 오히려 시원치 않커늘 보호란 말이 웬말이냐」 기세가 서릿발 같으니 고교(타카하시)란 놈이 말문이 막혀 말을 못하고 악날한 고문을 가한 끝에 서울감옥으로 압송하였다. 이듬해 왜형으로 종신형에 처하여 지도에 유배되였다가 고종황제 특명으로 얼마 후 석방되셨으나 왜경의 감시가 갈수록 삼엄하고 온갓 협박이 지독했지만 선생의 굳건한 절의는 갈수록 추상같았다. 을미년에 미국대통령윌슨이 불란서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를 타 호령의 유림대표들이 지산과 면우 정종석을 서수로 명작연 하여 장서를 파리에 보내 왜적의 침탈과 국권상실을 세계만방에 호소하였으나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고 더욱 왜적의 발악만을 불러 이르키게 되였다. 지산은 늙고 병들어 겨우 면금되였지만 면우는 대구옥에 갇이였고 선생과 친당 안병찬 성헌 임한주 전양진 최중식은 모두 체포되여 공주옥으로부터 대구로 이송되였다. 옥에 피금되는 날부터 왜인 형사들이 강압으로 이분들의 머리를 억삭하니 모든 구국지사들이 강그리 욕을 당했다. 선생은 아직도 완강히 뿌리치기를 「이놈들아 어서 내 목을 베어라 머리는 절대로 깍을 수 없다. 너의 괴수 놈을 불러와 가부를 따저보게 하라」 서슬이 하늘을 찔을 듯 하니 좌우 사람들이 모두 놀래여 어찌할 바를 몰랏다. 얼마 후 여러 형사들이 달려들어 선생을 단단히
결박하고 난폭한 언동으로 머리를 깍으니 아! 선생도 끝내는 버텨갈 수가 없었다. 여려분이 비분을 이기지 못하여 모두 식음을 전폐하고 선생은 와석신음 5일 동안이나 물 한 모금 넘기지 아니하니 형사가 규당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기계를 써서도 음식물을 먹일 수 있다. 이렇게 한다면 늙은이들이 죽지도 못하고 곤욕만 칠을 것이다」이토록 모진 악형을 겪은 끝에 나라 잃은 서름을 안은 채 가까스로 방면은 되였으나 선생은 매양 죽을 땅에 죽지 못한 것을 안타까이 여겼으며 일평생의 항일투쟁으로 가혹한 옥살이에 크나큰 상처가 병이 되여 마침내 이러나지 못하고 정해년 2월 15일에 낙계정사에서 운명하시니 슲으다! 그 달 18일에 수많은 유림과 자손들의 호곡 속에 낙지 선영 하경좌에 안장했다. 선생은 참으로 간세의 독실한 분이시다. 백절불굴의 기개와 천마불늑의 소양으로서 오직 구국일념의 형극의 발자취야 말로 후인들에게 애국애정의 정확한 지표를 제시하셨다. 그 공훈 어찌 천도가 무심하랴. 반기야 대한민국 건국포장이 추서되였으니 햇살같이 퍼지는 이 영광이여! 억천년 만대성의 숭앙을 받아 마땅하리로다.
단기 4316년 계해 7월 일 청양군수 김흥태 근수 / 우봉 이우녕 근찬 / 월성 최병식 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