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청양군 장평면 관현리 549-11
- 탐방로그
- 애국지사 이세영선생 유허비는 충남 청양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제국기 대한제국군 육군 참위, 독립의군부 충청, 전라, 경상도 3도의 사령관 등을 역임한 의병장. 독립운동가인 이세영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이세영의 이명은 이천민(李天民), 이유흠(李維欽)이고, 자는 좌현(佐顯)이고, 호는 고광(古狂), 고광자(古狂子)이다. 애국지사 이세영선생 유허비는 원관마을회관에서 266m 떨어져있으며, 도보로 5분 정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성명학교터는 홍주의병 참모장, 신흥무관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이세영 선생의 유허지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 이세영 선생의 성명학교터
■ 위치 : 충남 청양군 장평면 관현리 갓고개
독립운동가 이세영(1869~1938)은 한말 의병운동부터 3.1운동, 임시정부 수립까지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쳐온 우리 고장의 인물이다. 원래 아산군 음봉면에서 태어났으나 26세 때인 1894년 이곳으로 이사하여 일제침략에 항거, 을미, 병오홍주의병에서 민종식 의병장 등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황해도 해주, 강화군 등으로 종신 유배되었으나 1908년 형 집행중지로 풀려나 그해 봄 자신이 살고 있던 이곳에 후진양성을 목적으로 성명학교를 설립했다. 후에 만주로 망명한 이세영 선생은 독립군 양성과 후진교육을 위해 설립된 신흥강습소 소장, 신흥무관학교 교장 등 일생을 무장항일투쟁에 전념해 오다 안타깝게도 1938년 조국광복을 못보고 이역만리 만주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 위치 : 충남 청양군 장평면 관현리 갓고개
독립운동가 이세영(1869~1938)은 한말 의병운동부터 3.1운동, 임시정부 수립까지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쳐온 우리 고장의 인물이다. 원래 아산군 음봉면에서 태어났으나 26세 때인 1894년 이곳으로 이사하여 일제침략에 항거, 을미, 병오홍주의병에서 민종식 의병장 등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황해도 해주, 강화군 등으로 종신 유배되었으나 1908년 형 집행중지로 풀려나 그해 봄 자신이 살고 있던 이곳에 후진양성을 목적으로 성명학교를 설립했다. 후에 만주로 망명한 이세영 선생은 독립군 양성과 후진교육을 위해 설립된 신흥강습소 소장, 신흥무관학교 교장 등 일생을 무장항일투쟁에 전념해 오다 안타깝게도 1938년 조국광복을 못보고 이역만리 만주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비석이 있는 이곳은 성명학교 터로, 이세영 선생이 유배에서 풀려난 뒤 교육사업에 전념한 곳이다. 그는 육영사업에 힘써 1908년 4월 성명학교(誠明學校)를 세우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교육을 통해 국민들을 계몽시켜 장기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고자 하였다. 성명학교는 홍주의병에 참여했던 이상린을 비롯해 44명의 임원과 88명의 학생으로 시작했으며 측량과를 설치해 측량기사를 육성하고, 교육사업 뿐만 아니라 지역발전을 위한 사업들을 실행했다.성명학교는 일제가 민족교육을 탄압하기 위해 제정한 사립학교령에 의해 정식 인가를 받지 못했으며, 1909년 3월까지는 존속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폐교한 시기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애국지사 이세영 유허비
애국지사 이공세영 유허비
덕수인 이공 세영은 자가 좌현이요 호는 고광이니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12대손으로 1869년 아산군 음봉면 신휴리에서 휘 민하공과 숙부인 평강 채씨사이에서 태어났으니 숙부인이 백안호호를 현몽하고 공을 출생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일찌기 삼종숙 휘 민괄공에 입양하고 10세에 부친을 따라서 서울로 이거하여 판서 양공 헌수에게 수학하며 박창로, 이상린, 이봉학, 안병찬등과 시사를 논했다. 고종 32년 금홍집등이 일적과 통하여 민비를 시해하고 신정부으로 개편하매 송은 홍주의진에 입거하여 일군과 장렬히 싸웠다. 빙부 김좌은이 의병진 무도백휘관으로 원주진영에 부임시 공이 참모로 친위제1연대에 보직되어 정3품 친군1대대 부관으로 강원일원에서 크게 활약한바있다. 기후 청양군 장평면 관현리에 귀향하여 어치로서 종신을 도모하던중 이등박문이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이완용, 권중현등 친일내각과 을사오조약을 늑결하여 통감부를 설치하먀 송은 이를 묵과하지못하고 채광묵, 안병찬, 박창로등과 민공 종식의지의 참모장으로 홍주성에 입거하여 일군과 싸우다 피체되었다. 공은 충남결찰부에 압송되어 관찰사 김희진의 문초를 받은바 시종 불굴의 자세로 너는 일본의 양신이냐고 문초자릐 반성을 촉구하였다. 평리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황주로 유배되고 다시 강화 철도로
덕수인 이공 세영은 자가 좌현이요 호는 고광이니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12대손으로 1869년 아산군 음봉면 신휴리에서 휘 민하공과 숙부인 평강 채씨사이에서 태어났으니 숙부인이 백안호호를 현몽하고 공을 출생했다는 설화가 전한다. 일찌기 삼종숙 휘 민괄공에 입양하고 10세에 부친을 따라서 서울로 이거하여 판서 양공 헌수에게 수학하며 박창로, 이상린, 이봉학, 안병찬등과 시사를 논했다. 고종 32년 금홍집등이 일적과 통하여 민비를 시해하고 신정부으로 개편하매 송은 홍주의진에 입거하여 일군과 장렬히 싸웠다. 빙부 김좌은이 의병진 무도백휘관으로 원주진영에 부임시 공이 참모로 친위제1연대에 보직되어 정3품 친군1대대 부관으로 강원일원에서 크게 활약한바있다. 기후 청양군 장평면 관현리에 귀향하여 어치로서 종신을 도모하던중 이등박문이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이완용, 권중현등 친일내각과 을사오조약을 늑결하여 통감부를 설치하먀 송은 이를 묵과하지못하고 채광묵, 안병찬, 박창로등과 민공 종식의지의 참모장으로 홍주성에 입거하여 일군과 싸우다 피체되었다. 공은 충남결찰부에 압송되어 관찰사 김희진의 문초를 받은바 시종 불굴의 자세로 너는 일본의 양신이냐고 문초자릐 반성을 촉구하였다. 평리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황주로 유배되고 다시 강화 철도로
이송되었다가 해귀되었다. 귀향후 공은 국권회복의 지름길은 교육에 있을을 자각하고 1906년 실제 창영지기 이상린등과 더불어 이곳 적곡면 관현리에 설명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직을 맡아 인재양성에 전념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매 독립의군부 충청, 전라, 경상 3도 사령관 책임을 부여받고 국권회복에 진력하는 한편 순종의 밀명으로 전국에 대거 의병을 모사하던중 미성에 발각되어 중국으로 망명 신흥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만주 교포청년교육에 헌신하였다. 후에 이를 신흥무관학교로 개편하고 군사교육에 역점을 두고 조국광복을 위한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후 공은 상해에서 일본군과 교전중 암탄을 맞고 여생을 병고로 시달리면서도 후진양성에 전념하다가 중국 사천성 성도에서 72세로 서거하니 시신이 머나먼 외국땅 성도에 묻쳤다. 이제 조국이 광복된지 반세기에 이르렀건만 유해는 상기도 환국하지못하고 있으니 애닯기 그지없다. 정부에서는 한평생을 조국광복과 후진양성에 몸바친 공의 빛나는 공력을 추앙하여 1963년에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이렇듯 공의 항일 투쟁의 발자취와 숭고한 보국충절의 정신은 천추에 귀감이 될것이다. 여기 가신 님의 유지를 받들고자 시임 심대평 충청남도지사의 배려와 군민들의 성원을 받아 성명학교 옛터에 공의 공적과 함께 스스로 창립한 성명학교존안에서 위국가를 발화하여 그것을 빗돌에 새겨 후세에 전하노라.
爲國歌(위국가)
천강생민하오시니 신자병순이 아닌가. 요순우탕.......
爲國歌(위국가)
천강생민하오시니 신자병순이 아닌가. 요순우탕.......
충남 청양군 장평면 관현리 549-11 성명학교터를 찾아가고 있다. 그곳에 이세영 선생의 유허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