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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남도 청양군 운곡면 모곡리 293-2
- 탐방로그
- 운곡3.1운동기념비는 운곡면사무소 입구에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운곡3.1만세운동기념비
한민족(韓民族)의 역사(歷史)에 찬연(燦然)히 빛나는 삼일운동(三一運動)은 영원(永遠)한 겨레의 민족(民族精氣)를 담은 보고(寶庫)이다. 일본황국주의(日本皇國主義)의 무도(無道)한 계략(計略)으로 국권(國權)이 침탈당하고 민족(民族) 자존이 손상(損傷)되었다. 선열(先烈)들이 구국(救國)의 일념(一念)으로 항쟁(抗爭)하신지 어언구십년(於焉九十年)이 흘렀다. 뜨거운 가슴으로 외친 독립만세(獨立萬歲)는 천지(天地)를 진동(震動)시켰고 지칠줄 모르는 태극기(太極旗)의 추동(推動)은 삼천리강토(三千里疆土)에 물결쳤다. 기미년(己未年) 3월 1일(三月一日) 활화산(活火山)처럼 타오른 민족독립만세(民族獨立萬歲)는 조국(祖國) 강토의 지축(地軸)을 흔들었고 광활(廣闊)한 대지(大地)를 호령하시던 선조(先祖)의 혼(魂)이 서린 만주(滿洲)벌과 태평양(太平洋) 건너 이국(異國) 땅까지 메아리쳤다. 선열(先烈)들은 잔학무도(殘虐無道)한 일제(日帝)의 헌병경찰(憲兵警察)에 맨주먹으로 항거(抗擧)하시고 온갖 고난을 겪으시면서 일신(一身)의 영달(榮達)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리셨다. 오로지 국가(國家)의 자주(自主)와 독립(獨立)을 회복하고 민족(民族)의 번영과 발전(發展)을 위하여 온몸을 받쳐 희생하신 선열(先烈)들이 어찌 장(壯)하지 않고 후손(後孫)들이 어떻게 경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청양(靑陽) 운곡(雲谷)은 옛부터 충절(忠節)의 고장이었다. 우리는 민족(民族)과 국가(國家) 위난이 생기거나 국권(國權)이 침탈당할때 호국정신(護國精神)으로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홀(忽)
연(然)히 일어났다. 일제(日帝)의 잔혹(殘酷)한 식민무단통치(植民武斷統治)에 민족적(民族的) 항일운동(抗日運動)인 독립만세(獨立萬歲)의 고동(鼓動)은 끊이지를 않았다. 이곳 첩첩산중(山中)에서도 애국원정(愛國袁情)의 불타는 일편단심이 없었겠는가. 청양(靑陽)에서는 처음으로 4월(四月) 3일(三日) 미량리(美良里)에서 독립만세준비(獨立萬歲準備)가 일제(日帝)의 사전탐지(事前探知)로 제압을 당하여 울분이 더욱 고조(高潮)되었다. 이에 4월(四月) 6일(六日) 운곡(雲谷) 면민(面民)들은 신대리(新垈里)을 중심(中心)으로 각(各)마을 산(山)봉우리 정상(頂上)에서 독립(獨立)의 횃불을 올리고 목놓아 독립만세(獨立萬歲)를 부른 면민(面民)들이 육백명(六百名)이었다. 4월(四月) 8일(八日)에는 밤 10시경(十時頃) 비봉 면민(面民)과 함께 면내 각산(各山) 위에서 횃불을 놓고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 한 면민(面民)들이 6백명(六百名)이 넘었다. 독립(獨立)을 위한 항거(抗擧)로 효제리 27인 신대리 22인 원덕리 17인위 위나리 15인 모곡리 9인(九人) 영양리 5인 모두 95인의 인사(人士)들이 일제(日帝)의 비인간적(非人間的)인 태형(笞刑)으로 구십(九十)도 칠십(七十)도 오십(五十)도씩을 당하였다. 침략자(侵略者) 일제(日帝)의 잔인혹독(殘忍酷毒)한 탄압(彈壓)을 무릅쓰고도 독립(獨立)의 함성(喊聲)을 외친 선열(先烈)들이 어찌 숭고(崇高)하고 거룩하신분들 아니겠는가 위대(偉大)하고 고귀(高貴)하신 선열(先烈)들의 혼령과 구국(救國) 횃불이 있었기에 조국광복(祖國光復)의 영광(榮光)을 성취하고 일류국가(一流國家) 건설(建設)에 만진하여 조국(祖國)의 통일(統一)을 기약(期約)할 수 있지 않는가. 민족(民族)의 자주(自主)와 독립(獨立)을 위한 민족적(民族的) 항전(抗戰)인 삼일운동(三一運動)은 민족(民族)의 불명정신으로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기릴 자랑스럽고 소중(所重)한 유산(遺産)이다. 선열들이 의연(毅然)히 의거(義擧)하신지 구십성상(九十星霜)에 광복(光復)의 날을 맞이하여 기념비(記念碑)를 세우노라.
雲谷 己未 三.一獨立萬歲運動 有功者 芳名 (운독 기미 3.1독립만세운동 유공자 방명)
김현기(金顯基), 김병제(金柄濟), 김응태(金應泰), 김정배(金貞培), 김기배(金基培), 노의득(盧宜得), 명석진(明錫鎭), 박봉운(朴奉云), 박봉조(朴奉朝),
박삼용(朴參容), 박순용(朴順容), 박인용(朴仁容), 송석규(宋錫圭), 송석지(宋錫智), 유봉길(柳奉吉), 윤담(尹淡), 윤흥열(尹興熱), 이석규(李錫圭),
이정규(李正圭), 이태수(李泰洙), 임태봉(任泰奉), 장휴(張烋), 한태순(韓太順)
태형 70(笞刑 七十)
김순배(金順培), 강근득(姜勤得), 이중하(李重夏), 이계삼(李啓三), 이원하(李源夏), 박선옥(朴仙玉), 박재술(朴在述), 尹泌(윤필), 윤홍(尹泓),
윤정(尹淀), 윤란(尹爛), 박기문(朴基文), 이필심(李弼心), 이동하(李東夏), 김종삼(金鍾三), 성창기(成彰基), 윤동의(尹東儀), 송병호(宋秉好),
이계빈(李啓濱), 윤철(尹澈), 오업동(吳業同), 이성렬(李聖烈), 박제용(朴濟容), 박희경(朴羲庚), 윤봉영(尹鳳榮), 김동인(金東寅), 이석룡(李錫龍),
명옥진(明玉鎭), 윤명섭(尹明燮), 한지석(韓智錫), 한순옥(韓順玉), 윤수영(尹壽榮), 윤보영(尹甫榮), 복기성(卜箕聖), 이석후(李錫厚), 한낙석(韓洛錫),
한인수(韓仁洙), 한충석(韓忠錫), 한철수(韓澈洙), 김주갑(金周甲), 명희호(明羲湖), 윤홍영(尹洪榮), 윤규섭(尹奎燮), 한판석(韓判錫), 한인수(韓仁壽),
이정현(李正賢), 윤만영(尹萬榮), 최윤신(崔允信), 유환동(兪煥同), 명만수(明萬壽), 명조식(明璪植), 명회건(明會建), 명상식(明商植), 명재식(明載植),
명제국(明濟國), 송호조(宋好祚), 명제승(明濟陞), 명제식(明濟軾), 이규석(李圭碩), 명제덕(明濟德), 명주진(明周鎭), 최승삼(崔承三), 명경식(明璟植),
명명구(明命龜), 강성학(姜聖學), 조정준(趙靖濬), 황석주(黃碩周), 최순룡(崔順龍), 최경갑(崔景甲), 명제록(明濟祿), 명제관(明濟寬)
태형 50(笞刑 五十)
송계득(宋癸得)
김현기(金顯基), 김병제(金柄濟), 김응태(金應泰), 김정배(金貞培), 김기배(金基培), 노의득(盧宜得), 명석진(明錫鎭), 박봉운(朴奉云), 박봉조(朴奉朝),
박삼용(朴參容), 박순용(朴順容), 박인용(朴仁容), 송석규(宋錫圭), 송석지(宋錫智), 유봉길(柳奉吉), 윤담(尹淡), 윤흥열(尹興熱), 이석규(李錫圭),
이정규(李正圭), 이태수(李泰洙), 임태봉(任泰奉), 장휴(張烋), 한태순(韓太順)
태형 70(笞刑 七十)
김순배(金順培), 강근득(姜勤得), 이중하(李重夏), 이계삼(李啓三), 이원하(李源夏), 박선옥(朴仙玉), 박재술(朴在述), 尹泌(윤필), 윤홍(尹泓),
윤정(尹淀), 윤란(尹爛), 박기문(朴基文), 이필심(李弼心), 이동하(李東夏), 김종삼(金鍾三), 성창기(成彰基), 윤동의(尹東儀), 송병호(宋秉好),
이계빈(李啓濱), 윤철(尹澈), 오업동(吳業同), 이성렬(李聖烈), 박제용(朴濟容), 박희경(朴羲庚), 윤봉영(尹鳳榮), 김동인(金東寅), 이석룡(李錫龍),
명옥진(明玉鎭), 윤명섭(尹明燮), 한지석(韓智錫), 한순옥(韓順玉), 윤수영(尹壽榮), 윤보영(尹甫榮), 복기성(卜箕聖), 이석후(李錫厚), 한낙석(韓洛錫),
한인수(韓仁洙), 한충석(韓忠錫), 한철수(韓澈洙), 김주갑(金周甲), 명희호(明羲湖), 윤홍영(尹洪榮), 윤규섭(尹奎燮), 한판석(韓判錫), 한인수(韓仁壽),
이정현(李正賢), 윤만영(尹萬榮), 최윤신(崔允信), 유환동(兪煥同), 명만수(明萬壽), 명조식(明璪植), 명회건(明會建), 명상식(明商植), 명재식(明載植),
명제국(明濟國), 송호조(宋好祚), 명제승(明濟陞), 명제식(明濟軾), 이규석(李圭碩), 명제덕(明濟德), 명주진(明周鎭), 최승삼(崔承三), 명경식(明璟植),
명명구(明命龜), 강성학(姜聖學), 조정준(趙靖濬), 황석주(黃碩周), 최순룡(崔順龍), 최경갑(崔景甲), 명제록(明濟祿), 명제관(明濟寬)
태형 50(笞刑 五十)
송계득(宋癸得)
운곡3.1운동기념비를 탐방하러 충남 청양군 운곡면 모곡리 293-2 운곡면사무소에 왔다.
우리 선인(先人)들의 위대(偉大)한 업적(業績)은 후인(後人)의 산 교훈(敎訓)이며 민족진로(民族進路)의 지표다.
더구나 그것이 민족정기(民族精氣)를 살리며 국운(國運)을 지탱하는 힘이 된 일이라면 이는 금석(金石)에 올리며 청사(靑史)에 밝혀저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삶을 누리고 있음은 선현(先賢)들의 나라를 구(求)하고자하는 운동(運動)에 힘입은 바 크다.
우리들은 선현(先賢)의 숭고(崇高)한 그 정신(精神)을 백세(百世)토록 전수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운곡지방(雲谷地方)에서 노도와 같이 일어났던 삼일독립만세운동(三一獨立萬歲運動)
그 날의 선현(先賢)들의 충정을 망은(忘恩)하고 지금것 살아왔으니 그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다시 한 번 상기(想起)하면서 도내(道內)에서도 이름있는 만세운동(萬歲運動)의 발생지(發生地)인 이 곳에 선현(先賢)들의 호국정신을 후세(後世)에 영구(永久)히 전수코자 이 비(碑)를 세우노라.
서기(西紀) 이천팔년시월(二千八年十月) 일(日)
운곡삼일만세운동유공자유족회(雲谷三一萬歲運動有功者遺族會)
청양군(靑陽郡) 독립유공자유족회(獨立有功者遺族會)
더구나 그것이 민족정기(民族精氣)를 살리며 국운(國運)을 지탱하는 힘이 된 일이라면 이는 금석(金石)에 올리며 청사(靑史)에 밝혀저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삶을 누리고 있음은 선현(先賢)들의 나라를 구(求)하고자하는 운동(運動)에 힘입은 바 크다.
우리들은 선현(先賢)의 숭고(崇高)한 그 정신(精神)을 백세(百世)토록 전수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운곡지방(雲谷地方)에서 노도와 같이 일어났던 삼일독립만세운동(三一獨立萬歲運動)
그 날의 선현(先賢)들의 충정을 망은(忘恩)하고 지금것 살아왔으니 그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다시 한 번 상기(想起)하면서 도내(道內)에서도 이름있는 만세운동(萬歲運動)의 발생지(發生地)인 이 곳에 선현(先賢)들의 호국정신을 후세(後世)에 영구(永久)히 전수코자 이 비(碑)를 세우노라.
서기(西紀) 이천팔년시월(二千八年十月) 일(日)
운곡삼일만세운동유공자유족회(雲谷三一萬歲運動有功者遺族會)
청양군(靑陽郡) 독립유공자유족회(獨立有功者遺族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