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청양군 목면 화양리 806
- 탐방로그
- 윤병일 선생 기적비는 화양1리 마을회관에서 261m 떨어져있으며, 도보로 4분 정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공의 위적은 만인의 숭앙이요. 천추에 규범이니 이를 밝힘은 공훈을 기리고 교화를 바르게 하고자 함이라. 이에 공을 추모하는 인사 이영복과 우봉명과 이광선과 우형식과 복상교와 아울러 족인 용원과 종상과 종규와 종해와 창수와 홍수 등의 賢勞(현로)로 이 비를 그 고리에 세워 후세에 模楷(모해)케 하고자 하노라.
서기 1991년 신미 7월 일
청양군수 이호종 찬
후학 월성후인 최병무 서
화강 윤선생 유공 현창회장 이원강 수
서기 1991년 신미 7월 일
청양군수 이호종 찬
후학 월성후인 최병무 서
화강 윤선생 유공 현창회장 이원강 수
청양군 목면 화양리 805를 찾았다.
愛國志士 漆原 尹公 炳日 紀績碑(애국지사 칠원 윤공 병일 기적비)
애국지사 윤병일 기적비(愛國志士 尹炳日 紀績碑)
애국지사 윤병일 기적비(愛國志士 尹炳日 紀績碑)
선생은 1873년 목면 화양리 오산동제에서 태어났다. 1906년 4월 민종식이 이끄는 홍주의병이 홍주성을 점령했으나 일본군의 맹공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선생은 좌군관에 임명되어 민종식 대장과 함께 청양에서 의병 4백여 명을 모아 재기할 것을 도모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6년 7월 연산면에서 이학순, 이용규, 조종국 등과 다시 의병을 모집하던 중 배신자의 밀고로 강경경찰서에 체포되어 1917년 5월부터 강화 석모도에서 1년 간의 유배형을 살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고, 1991년 7월 기적비를 세웠다.
선생은 1873년 목면 화양리 오산동제에서 태어났다. 1906년 4월 민종식이 이끄는 홍주의병이 홍주성을 점령했으나 일본군의 맹공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선생은 좌군관에 임명되어 민종식 대장과 함께 청양에서 의병 4백여 명을 모아 재기할 것을 도모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6년 7월 연산면에서 이학순, 이용규, 조종국 등과 다시 의병을 모집하던 중 배신자의 밀고로 강경경찰서에 체포되어 1917년 5월부터 강화 석모도에서 1년 간의 유배형을 살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고, 1991년 7월 기적비를 세웠다.
愛國志士 漆原 尹公 炳日 紀績碑(애국지사 칠원 윤공 병일 기적비)
애국지사 칠원 윤공 휘 병일 기적비문
고 애국지사 칠원 윤공의 휘는 병일이요 자 장일이며 호 화강이다. 현조의 휘 환이니 려말에 관대중이며 시충효 공의 19대손이다. 고의 휘 소권이니 이 효행으로 증 통정대부요 비 증 숙부인 김해김씨니 현풍의 녀이다. 공은 서기 1873년 고종 계유 12월 12일에 청양군 목면 화양리 오산동제에서 출생하였으며 특히 그 명철한 지혜와 빼어난 행의를 들면 애국은상과 항일투지는 살신성인의 유공으로 현금까지 명성이 자자하다. 서기 1957년 정유 8월 23일에 별세하여 묘 오산동 후녹병좌하다. 아! 저 간악한 일본은
고 애국지사 칠원 윤공의 휘는 병일이요 자 장일이며 호 화강이다. 현조의 휘 환이니 려말에 관대중이며 시충효 공의 19대손이다. 고의 휘 소권이니 이 효행으로 증 통정대부요 비 증 숙부인 김해김씨니 현풍의 녀이다. 공은 서기 1873년 고종 계유 12월 12일에 청양군 목면 화양리 오산동제에서 출생하였으며 특히 그 명철한 지혜와 빼어난 행의를 들면 애국은상과 항일투지는 살신성인의 유공으로 현금까지 명성이 자자하다. 서기 1957년 정유 8월 23일에 별세하여 묘 오산동 후녹병좌하다. 아! 저 간악한 일본은
한반도 침략의 야망을 품고 1895년 을미사변을 이르켰다. 이에 울분한 애국지사들은 의열의 기치를 들고 항일할 것을 다졌다. 공은 1904년 정산에서 일어난 세부토지측량저지의 민란사건에 가담하였으니 이는 일본인이 세금과적의 행위라 하고 저지하였음은 항일의거의 첫자취이다. 흉폭한 일본은 다음 1905년에 을사조약을 맺아 국권을 강탈하니 때에 전임 이조참판으로 정산천 장리에 낙향한 민종식이 동지를 모아 국권을 바로잡기 위하여 깃발을 높이 들매 공은 그 휘하에 출진하여 좌군관으로 참전하니 이것이 1906년 고종 병오 4월에 거사한 홍주의거이다. 이때에 정산 청양 보령 홍산 등지에서 운집한 수천명의 의여로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홍주성을 탈환하기 위하여 통감 이등박문의 주차군사령부에 명령을 내려 그 맹격을 받아 패퇴하였다. 이에 공은 재기를 위하여 청양 유치에서 사백여명의 의병을 수습하여 의병장 민참판과 더불어 1대 의거를 도모할 것을 절치부심 맹약하였으며 기후 1916년 기말에 논산군 연산에서 이용규와 이만식과 조종국 제공과 거의를 모약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여 강화 석모도에서 1년간의 유배형을 받았다. 다음 1917년에 석방되어 향제에 살면서 출입을 삼가하고 세연을 멀리하다가 쇠년에 조국광복의 영광을 맞이하였으니 그 기쁨을 어찌다 형언하리오. 아! 공은 오직 자나깨나 조국광복의 항심은 전생애를 통하여 빼았지 못할 입지요 성인을 위한 구국일념의 업적이라 하겠다. 이 훌륭한 의기와 영명은 공의 몰후에 청사와 구전으로 찬연하더니 반기야 국가보훈처의 상신으로 지난 1990년 8월 광복절에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니 고장 사람들이 공의 평생의 업보라 하며 추송하였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