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훈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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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청양군 남양면 흥산리 423
탐방로그
광복의사 한훈사적비는 충남 청양에 위치하며, 한훈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한훈 사적비와 한태석 사적비는 나란히 옆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한 전 낙안군수 임병찬이 조직한 의군부에 가담하여 총독 테라우찌에게 정권반환요구와 철수요구서를 제출하였다. 임병찬이 피체됨으로써 뜻이 좌절된 공은 만주로 건너갔다. 1913년 공은 길림에서 권총 수정을 구입 귀국하여 풍기에서 채기중 염창순 유장열 강병수 김병렬 정만교 김상옥 정운홍 정진화 황상규 이각등과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대 광복단을 조직하고 무기구입을 위하여 수차 만주에 왕래를 하는 한편 곽한일 김재순과 비밀리에 도일하여 한국침략의 원흉들을 제거할것을 모의하다가 사전에 일경에 발각되어 만주 봉천으로 일시 망명하였다. 1915년 공은 박상진 우재룡 양제안 권녕만 김한종 엄정섭등과 합류하여 광복단을 군대식편제인 광복회로 조직을 강화하여 국내외로 분리 활동키로 하였다. 공은 김상옥 유장열 곽경렬등 동지들과 함께 전라도 보성군의 박용 낙안군의 벌교등지에서 친일주구의 도륙에 적극활동하는 한편 조성일헌병분대를 습격함으로써 무기 다수를 탈취하여 일경과 맞서싸워 전공을 세우고 다시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기미독립만세운동이후 해외독립운동가들의 뜻이 모아져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니 동년 12월에 공이 국내대표로 상해에 파견되어 임정의 주석 김구 이동휘 이시영 안창호 신익희등의 요인들에게 국내투쟁강화의 필요성을 역설한 결과 탄약 300여발 폭탄 10개를 얻어와 이를 운학 김병순 최기배에게 보관시키고 서울을 중심으로 조선독립군 사령부라는 독립단을 조직하고 김상옥 김동순 서대순 최석기등의 암살단과 합류하여 1920년 8월 24일 미의원단의 내한을 기회로 일총독 제등을 암살하고 각 관서를 폭파하여 민족의 진의를 전세게에 천명하려는 계획을 수립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많은 암살단원과 광복단원이 투옥되는 비운을 맞았다. 공은 이 사건으로 혹독한 고문과 학대로 중병을 얻어 서대문 광주 전주 대전 신의주등 각형무소로 전감되면서 상라서 출옥하지 못할것을 깨닫고 자진을 결심하고 신의주형무소에 27일 대전형무소에서 26일간을 단식하였으나 일경의 집요한 공세로 실패하고 수감된지 19년 6개월만에 형집행정지로 귀가 치료중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광복후 의사는 옛동지를 상봉하여 독립된 조국에 남은 여생을 바치기로 뜻을 정하고 광복단을 부흥시키매 단장으로 피
선되어 황동하다가 6.25동란으로 귀가하여 신병치료중 9.28수복직전에 논산군 두마면 정장리 자택에서 북군에게 연행되어 논산군 두계역과 대덕군 묵석역 중간지멍에서 학살되어 순국하였다고하나 유해를 찾지 못하였다. 정부에서는 공의 애국충절과 살신성인하신 성충대의를 기리 현창하고자 1968년에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을 추서하고 국립묘지에 유품을 안장하였다. 이렇듯 의사의 강판한 항일투쟁의 발자취는 바로 조국 광복의 저력이 되었으며 백절불굴의 거룩한 애국정신은 정의구현의 대도였다. 이제 가신분의 높은 뜻을 추앙하고 영원히 빛내기위하여 시임 심대평 충남도지사의 배려와 군민의 성원으로 여기 의사의 출생지 선영하에 그 사적을 새겨 후세에 전하노라.
충남 청양군 흥산리 216 한훈선생의 생가터를 찾았으나 찾을수가 없다.
주민에게 흥산2리를 물으니 좀더 올라가라고 한다.
충남 청양군은 애국지사 유적지에 대한 관리가 매우 잘 되어 있다. 큰 도로가에 저렇게 안내판이 항상 서 있다.
GPS상의 주소는 충남 청양군 남양면 흥산리 423이다.
한훈(1890~1960) 선생은 1906년 민종식 의병전에 가담하여 홍주성 공방전에서 활약하였다. 그후 부여,공주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악질 친일군수인 직산군수를 사살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3년에는 채기중.유창순 등과 같이 풍기에서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여 일본군을 습격하는 활동을 하였다. 1919년에는 만주 길림성에서 김동순 등과 함께 조선독립군정서에 가입하여 국내외로 군자금을 보급하는 활약을 하였다. 서울을 중심으로 조선독립군사령부라는 독립단의 조직을 준비하는 중, 사이토마코토(齋藤實) 총독 등 일본 고관들을 암살하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이때 김상옥 등의 암살단과 합류하여 계획을 추진하던 중 체포되어 1919년 6월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 건국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 청양군에서 1990년에 선생의 출생지에 사당과 사적비를 건립하였다.
청주인 한공 휘 우석은 별명이 훈이요 호가 송촌이니 고려개국공신 태위공 휘 난을 시조로 하여 서기 1890년 3월 27일에 청양군 사양면 흥산리에서 휘 성교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니 애국지사 태석의 아우가 된다. 공은 5척 단구에 총명대담하고 침착한 기품을 타고 았으니 유년부터 주위의 갈망속에 학문에 정진하더니 성장하매 일찌기 이 고장 칠갑산에서 일군과 항쟁하다가 전사한 의병인 숙성씨의 유언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국권회복에 헌신할 의지를 굳혔다가 때마침 합천에서 일본군에 패한 홍주의병장 참판 민종식이 보령 청나에서 도지를 규합하여 재거를 계획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홍주의병진에 참가하여 1906년 5월 19일에 일군이 점한 홍주성을 탈함하였고 의병소모장이 되어 각지의 의병을 홍주의진에 소집하여 1000여명의 대부대를 만드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어 공은 윤이병, 나철, 기산도, 이상학등과 을사오적을 주참하려다가 나철, 기산도등이 일경에 체포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정산, 공주등지 에서 의병으로 항재하다가 친일노 곡산군수를 살해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경술국치로 일제가 식민무단통치를 강화하여 우리 민족을 압박하자 공은 다시 1911년에 귀국하여 다음해에는 일찌기 순창의거로 체포되어 최익현과 같이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가 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