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억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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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 586-4
탐방로그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 586-4 인수뫼공원 경천 정대억의병장 추모비를 찾아가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이곳이 인수뫼공원이다.
인수뫼공원
인수뫼 소묘 박찬갑

山이 있어
맑은 공기
큰 마음이 열리고

물이 있어
자연 섭리를
일깨워 주신다네

이곳 사람들
얼굴은
햇빛에 그을고
손은 거칠어도
정겨운 옛 냄새가 풍겨

산이 좋아
물이 좋아
이웃이 좋아
머물다 가려하네.
敬天丁大億義兵將追慕碑(경천 정대억 의병장 추모비)
敬天丁大億義兵將追慕碑(경천 정대억 의병장 추모비)
경천 정대억 의병장 기념비

영월은 항일 의병 항쟁의 중심지로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반포되자 의암 류인석 의병장은 영월 관아의 문루에 복수보형(復讐保形)의 깃발을 높이 걸고 영월 을미의병을 창의하였다. 이때 정대억 의병장도 24세 젊은 나이로 구국항쟁과 국난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1905년 삼계 원용팔 의병장은 주천에서 을사의병을 일으켰다.

경천 정대억의병장은 1872년 11월 6일 영월 삼옥리에서 출생해 북면 언덕 오만에서 성장했다. 본관은 나주로 야은공 정사종의 후손이다.

삼옥리에서 가선대부 행 용양위호군 겸 오위장인 부친 병교(炳敎)와 모 파평윤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선생께서는 1905년 영월 주천 을사의병인 삼계 원용팔의진에서 참모 종사로 활동하였다. 이때 함께한 의병장으로는 엄성하, 엄기섭, 그리고 제천의 지규창, 지병언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의병대장 원용팔이 체포되어 옥사하고 의병 진영이 무너지자 그는 2년 동안 강원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적의 배후를 기습하는 게릴라식의 유격투쟁을 했으며, 일제의 감시로 고향인 영월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정대억 의병장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함께 군대 해산 등 일제 침략이 가속화되자 또다시 항전에 나서 운강 이강년의 정미의병에 참여하였다. 이강년과 함께 작전을 펼쳐 주천면 판운리에서 왜병 36명을 무찔렀고, 충주 가흥에서도 12명을 사살하였다.

이후, 그는 영월 김삿갓면에 사는 김상태(金尙台) 의병장과 안성해, 백남규, 변학기, 성익현,정경태 등과 충청도.강원도 일대와 안동 서벽 전투에서 일본군을 맞아 크게 승리하였다.
이듬해 8월 이강년 의병장이 단양군 청풍의 적성(일명 까지성) 전투에서 체포될 때까지 1년 3개월 동안 민긍호, 신돌석 의병대장과 연계하여 일제를 격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선생은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중 왜군의 거센 저항에 못 이겨 1908년 6월에 일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선생은 왜군에게 의병대장이라고 대답하고 조금도 동요됨이 없었다. 기회를 엿보다 왜군 6~7명을 부상시키고 탈출에 성공하였으나 6월 4일 다시 체포되어 영월로 연행되었다. 6일 후인 6월 10일 일본 헌병대는 영월읍 오리정(오목)에서 영월군민을 모아놓고 눈을 빼고 목을 베어 잔인하게 처형하니 선생은 37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영월 군민들은 선생의 영혼을 위무하고 애국 애족하는 높은 뜻을 빛내기 위해 1995년 8월 15일 영월 금강공원에 선생의 순국비를 세우고 후세의 교훈으로 삼고 있다. 선생의 독립 운동 공적은 영월문화원 엄흥용 원장이 수년간 영월지역 독립유공자 발굴과 의병 현창사업을 추진하는 과정
에서 정대억 의병장의 후손을 찾아냈고, 선생의 국난회복 활동의 업적을 밝혀냄으로써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3.1운동 100주년인 201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항일의병의 발상지인 영월 의병의 역사적 발자취는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도 우리 고장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이에 구국의 일념으로 평생을 살다가 간 정대억 의병장의 충절과 항일 의병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오늘 영월 군민의 뜻을 모아 선생의 출생지인 이곳 삼옥리에 이 빗돌을 세운다.

2022년 11월 23일
정대억의병장의 사적은 2019년 서훈을 받기전인 2016년 금강공원에 있는 항일의병장 정대억의사 순국비를 탐방한적이 있다.
영월군 영월읍 삼옥리 586-4 인수뫼공원 경천 정대억의병장 추모비를 찾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