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123-1
- 탐방로그
- 원태근 의거비를 찾기 위해 경기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123-1 안양만안시립도서관광장에 왔다. 원태근 지사는 김태우, 김태근, 원태우로도 불리며, 해당 사적은 원태우 지사라고 명시되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원태우(元泰祐) 지사 의거비(義擧碑)
원태우 지사는 고려말의 대유학자 원천석의 후손으로 1882년 3월 4일 안양시 안양동 642번지에서 부 태성 모 이호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평소 올바른 일에 앞장서는 의기가 강했던 지사는 23세이던 1905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격분하여 그 원흉인 이토히로부미를 응징 한국인의 항일의지를 만천하에 알릴 것을 계획하던 중
1905년 11월 22일 이토히로부미가 수원지역을 유람 후 경부선 열차로 귀경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석수2동 안양육교 부근에서 이토히로부미를 향해 투석 수 주일간의 진료를 요하는 큰 상처를 입혀 안양인의 기개를 떨쳤을 뿐 아니라 국내외에 자주독립운동을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지사는 거사 후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헌병사령부에서 2개월간의 모진 고문을 당하는 옥고를 치루고 석방되었으나 지속적인 감시와 탄압으로 불우한 삶을 살다가 슬하에 자녀도 두지 못한채 1950년 6월 25일 69세를 일기로 의로운 생을 마감했다.
고인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을 기리어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으니 이는 우리 안양인의 영예는 물론이거니와 호국정신을 모든 국민이 길이 계승하고자 의거 결행 87주년을 맞아 고향 후배들의 단체인 '새안양회'에서 삼가 이 비를 세우노라.
원태우 지사는 고려말의 대유학자 원천석의 후손으로 1882년 3월 4일 안양시 안양동 642번지에서 부 태성 모 이호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평소 올바른 일에 앞장서는 의기가 강했던 지사는 23세이던 1905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격분하여 그 원흉인 이토히로부미를 응징 한국인의 항일의지를 만천하에 알릴 것을 계획하던 중
1905년 11월 22일 이토히로부미가 수원지역을 유람 후 경부선 열차로 귀경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석수2동 안양육교 부근에서 이토히로부미를 향해 투석 수 주일간의 진료를 요하는 큰 상처를 입혀 안양인의 기개를 떨쳤을 뿐 아니라 국내외에 자주독립운동을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지사는 거사 후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헌병사령부에서 2개월간의 모진 고문을 당하는 옥고를 치루고 석방되었으나 지속적인 감시와 탄압으로 불우한 삶을 살다가 슬하에 자녀도 두지 못한채 1950년 6월 25일 69세를 일기로 의로운 생을 마감했다.
고인의 숭고한 애국애족의 뜻을 기리어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으니 이는 우리 안양인의 영예는 물론이거니와 호국정신을 모든 국민이 길이 계승하고자 의거 결행 87주년을 맞아 고향 후배들의 단체인 '새안양회'에서 삼가 이 비를 세우노라.
경기 안양시 만안구 안양동 123-1 안양만안시립도서관광장
원태우 지사 의거비(元泰祐 志士 義擧碑)
원태우 지사 의거비(元泰祐 志士 義擧碑)
원태우(1882~1950) 지사는 안양출신 애국지사로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강제로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조약에 비분강개하여 단신으로 애국의거의 거사를 감행하였다.1905년 11월 22일 민족의 원흉 이토히로부미가 수원에서 기차를 타고 안양역을 경유 서리재고개(현재 안양육교)를 지날 때 민족의 울분이 어린 돌을 던져 큰 상처를 입힘으로 자주독립운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거사 후 원태우 지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루고 풀려났으나 평생을 불구로 지내다 1950년 69세를 일기로 의로운 삶을 마감하셨다.
원태우(1882~1950) 지사는 안양출신 애국지사로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강제로 외교권을 빼앗은 을사조약에 비분강개하여 단신으로 애국의거의 거사를 감행하였다.1905년 11월 22일 민족의 원흉 이토히로부미가 수원에서 기차를 타고 안양역을 경유 서리재고개(현재 안양육교)를 지날 때 민족의 울분이 어린 돌을 던져 큰 상처를 입힘으로 자주독립운동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거사 후 원태우 지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모진 고문과 옥고를 치루고 풀려났으나 평생을 불구로 지내다 1950년 69세를 일기로 의로운 삶을 마감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