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학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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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발산리 142-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박영학 선생의 묘소는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발산리 142-7로 확인되었다.
네비게이터에서는 이곳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위성지도를 보면 이 숲 아래 쪽에 묘소로 추정되는 것이 보였다.
솦과 밭 사이의 길로 숲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숲이 끝나는 부근에 묘비가 보였다.
묘비 옆면에서 박영학 선생의 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통령 표창 독립운동 유공자 박영학의 묘
박영학 선생의 본관은 밀양이시며 서기 1878년 9월 25일 충남 연기군 동면 예양리에서 박명진씨의 독자로 출생하시었으며 부인 김정숙 여사와의 사이에 3남1녀를 두시었다. 선생은 16세때 천안군 수신면 발산리로 이사하시어 한학공부를 하시며 농사에 종사하시었다. 서기 1910년 9월 한일합방이 되자 이에 통분하신 선생은 우국동지를 규합하여 구국운동을 꾀하시어 일경의 주시대상 인물로 감시가 심하자 친척집등으로 1년 여 피신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 서기 1919년 3월 1일 밤 김교선 이순구 이백하 동
지들과 천안 진천 청주 지방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에 합의 동 일자에 봉화를 올리고 만세운동을 이르키시다. 특히 선생은 부인 김정숙여사를 시켜 부녀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적극 도우도록 하여 많은 부녀자가 가담토록 하시었다. 선생 자신은 수신면 발산리 뒷산에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부르시다가 참지 못하여 봉화 속에 뛰어들어 분신자살을 기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만 이사건으로 인하여 뜻있는 민중들로 하여금 독립투쟁의 의지를 더욱 고조시키었다. 또한 선생은 서기 1919년 4월 1일 음3월 1일 유관순 조인원을 중심을로 자주독립을 위한 국민궐기 만세운동을 전개 할것을 결심하고 병천 아우내 장터에서 약 삼천여명의 군중과 같이 만세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자 급거 출동한 왜군경의 무차별한 발포로 순국자가 속출하고 선생을 비롯한 많은 인사가 체포되었다. 선생은 서기 1919년 4월 27일 천안헌병대에서 태형 60도를 집행받아 빈사상태가 되여 석방되었으나 태형이 원인되어 서기 1920년 8월 7일 순국하시니 향년 42세이시었다. 서기 1982년 8월 15일 자주독립운동에 헌신노력한 공이 인정되어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으시니 선생의 숭고한 애국충절을 길이 후세에 전하고자 이 비를 세원 그 공적을 영원히 기리는 바이다.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해정리 20-33 도로변 순국선열 박영학 선생의 묘소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