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구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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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발산리 산50-1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이순구선생외 집안 두분의 석물이 같이 서 있었다.
大統領 表彰 獨立運動 有功者 李旬求 追慕碑(대통령 표창 독립운동 유공자 이순구 추모비)
이순구 선생은 본관이 한산이며 고려말의 명신 목은 이색 선생의 20대손으로 서기 1898년 12월 28일 철원군 수신면 발산리에서 이공 정규와 조씨 한석의 삼남으로 출생하였다. 일찌기 부친을 여의고 한학을 공부하던 중 서기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이에 통분하여 우국동지들과 항일투쟁을 결의하는 한편 서울의 친척 이덕구와 왕래하면서 그 동생 길구와 함께 조국독립의지를 굳게 다짐하였다. 마침내 서기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여 열렬히 독립만세를 부르고 이 3.1운동을 지방으로 확산시키기 위하여 고향의 홍일선, 김교선, 박영학 등과 함께 동년 3월 30일을 기하여 수신면 발산리를 비롯하여 부근 각 부락에서 봉화 시위를 일으켰다. 동년 4월 2일(음력 3월 1일)에는 조인원 김상훈 유관순 등이 주도하는 병천 아우내 장터 거사에 합류하여 대대적인 민중궐기를 지휘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의 발포로 흐트러진 민중을 다시 모아 병천 헌병주재소 습격 단행에 앞장서서 건물을 파괴함으로서 민중의 기세를 돋구었다. 이때 지원 온 헌병의 무차별 발포로 희생자가 많이 나고 선생께서도 오른손에 총상을 입고 피신하여 은밀히 다음 거사를 기도하다가 체포되어 서기 1919년 5월 3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아 복역하였고 동지 이길구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정요원으로 활약하였다. 선생은 그 뒤 망국의 한과 옥고로 얻은 병으로 고생하시다 끝내 요시찰인물로 종시하다가 서기 1
951년 8월 11일 부인 김준임 여사와 슬하에 수복 영복 정복 춘복 인복 등 5녀만 남기고 돌아가시니 향년 53세였다. 선생은 마침내 조국 광복에 이바지한 공에 의하여 서기 1982년 8월 15일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추서받으셨다. 이에 선생의 거룩하신 애국충절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저 서기 1985년 9월 25일 천원군수 최영섭은 이 비를 세워 그 행적을 기리는 바이다. 을축 추 송재 김진상 서각
숲이 너무 우거져서 그런지 카메라가 GPS 신호를 받지를 못하고 있어서 GPS좌표를 얻기위해 스마트폰으로 별도 추가 촬영하였다.
이곳의 GPS상의 주소는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발산리 산 50-14 이다.
이곳이 이순구 애국지사의 묘소가 있었던 자리라고 알려주셨다.
천안 향토사학자이신 김종식 선생을 찾아뵙고 애국지사 묘소 안내를 받기로 하였다.
김종식 선생께서 첫번째 안내해 주신 곳은 애국지사 이순구 선생의 구 묘비이다.
묘소는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하신 후 석물이 남아있다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