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우석, 조화벽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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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산55-4
탐방로그
유관순 열사의 오빠 역시 애국지사이시다. 1968년에 순국선열 유족회장을 지내시다가 서거하신 후 고향 선산에 묻혔다는 자료를 찾았다. 유우석의 부모님인 유중권, 이소제의 묘에서 생가 방향으로 약 100여미터 떨어진 위치에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유관순열사의 오빠이신 유의석선생과 부인이신 조화벽선생의 묘소이다.
의사 유의석선생 묘비. 충의로 일생을 마치고 이곳에 잠드신 독립투사 류우석 선생은 아명이 관옥 호가 옥계 또는 백노이시니 서기 1899년 5월 7일 천원군 병천면 지령리에서 류중권 선생과 이소제 여사의 맏아들로 태어나시니 순국처녀 류관순 열사의 오빠이다.
어려 한학을 배우다가 아버님이 설립하신 홍호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서울 배제학당을 거쳐 공주영명학교 재학중에 기미독립선언이 발표되자 동지들과 공주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투옥되었다. 이때 아우내 만세운동 주동자로 검거되어 공주에 압송되어 온 누이 관순을 만나 비로소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총살당한 사실을 알고 일제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쳤다. 1년만에 출옥하여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조국수호회 사건으로 검거되었고 원산청년회 사건으로 4년 옥고를 치렀다. 다시 함흥단천 청진만 주연 해주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시다가 피검되셨고 양양강릉고성 등지에서 설악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주도하시다가 일곱차례나 검거되셨으나 끝내 굽히지 않으셨다. 일본이 패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니 옥고에 지친 몸을 이끌고 대한노동총연맹 독립노동당 전국혁명자 총연맹유도회유도 청년회 독립운동자동의회순국선열유족회 등을 조직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민회의 산업분과 위원등으로 반탁운동 및 남북통일 과업 추진에 헌신하시다가 1968년년 5월 28일 향년 69세로 영면하시니 사회장으로 모시었다.
부인 조화벽 여사는 조영순 목사의 따님이다. 개성 호수돈여학생으로서 기미년 3.1운동때 개성만세운동을 주동하고 이어 양양만세운동을 크게 일으켰다. 그후 공주 영명여학교 교사로 재직중 아우내 만세운동으로 부모를 잃은 류관복 관석 형제를 거두어 양육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셨다. 서울 배화 개성호수돈여학교로 옮기면서도 관복 3형제를 동기 같이 보살폈으며 류우석 선생과 결혼한 후에는 원산진성여학교에 근무하면서 부군의 원산청년회 활동 적극 도우셨다. 부군이 4년만에 출옥하여 양명의 곁을 떠나시니 양양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병구완을 지성으로 하여 효녀의 칭송이 자자했으며 정명학원을 설립하여 민족정신을 일깨우다가 일제강압으로 폐교당했다. 조국이 광복된 후 월남하여 부군의 개국활동을 도우시다가 1975년 9월 3일 향년 80세로 영면하시니 정부에서는 류우석 선생에게 건국포장을 부여하고 화백 여사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거룩하시다. 백노선생 내외분이시여! 아내 지어머니 누이 한가족이 함께 이 나라의 수호신이 되어 온 겨레의 추앙을 받으시니 그 호국정신은 이 겨레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빛나시리라. 서기 1984년 10월 12일 천원군수 윤형영 지음
도로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도로상의 이 지점의 주소는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 416-6 이다.
주위를 탐사한 결과 유관순 열사의 부모님 묘소에서 생가 방향으로 약 100여미터 더 와서 찾을 수 있었다.
지사 현당 류제충 무덤. 비문을 읽어보니 류우석 선생의 아드님이시다.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성지, 매봉 기슭에 아까운 인재가 길이 잠들고 계시니 곧 현당 류제충님이시다. 임은 독립투사 백노 우석 선생과 애국지사 조 화벽 여사의 아들이요, 의사 중권 선생의 손자요, 순국 처녀 관순 열사의 조카이다. 대한민국 육년 을축사월 육일 개성부 만월동에서 나시니, 용모가 훤출하고 마음이 활달하며, 효성이 뛰어나고 우애가 도터우셨다. 어릴때부터 엄한 아버지의 뜻을 잘 받들었으며, 아우에게 의복 음식 잠자리까지도 좋은것은 모두 사양하고, 험하고 어려운 일은 혼자 맡아 하셨다. 춘천 중학교를 졸업하자, 왜적의 강제 징용에 끌려 만주까지 갔다가 슬기로 탈출하여 지하 운동을 하시다가 다행히 을유년 팔일오 해방을 맞이하였다. 서울 대학교 문리과 대학에 입
학하여 열심히 공부하는 한편, 학생 운동을 하시는 중 불행히 경인년 육이오 사변을 당하였다. 부모를 모시고 고향 목천 지령리로 돌아가 비록 전쟁중이나 농촌 진흥 운동을 펴시다가, 다행히 서울이 수복되자, 다시 중앙대학교 정외과를 졸업하고, 이어 노동학생 총연명, 노농청년 총연명, 독립노동당의 각 중앙집행위원을 거쳐 독립노농당 상임대표회의 비서처장, 독립노농당 외무위원장이 되어 독재를 물리치고 복지국가 건설에 힘쓰다가 여러번 옥살이도 하였으며, 한편 안성 명륜중학교장이 되어 후진 교육에 공헌하시니, 이는 정명학원을 세운 어머니와 홍호학교를 세운 할아버지의 거룩하신 뜻을 받듦이었다. 그러나 하늘이 사람은 내고 명은 아끼어 아깝게도 사십칠세를 일기로 임자 십이월 삼십일일에 돌아가니 세상사람이 많이 울었다. 부인 김정애 여사는 선산 사람이니, 정치학 석사로 교육계에 몸 바쳐 있으며, 아들 덕상은 학문에 정진하고 있다. 이제 임의 환갑을 맞이하여 종중에서 그 재덕을 기리어 이 비를 세우며, 어른께서 구상에게 비문을 명하시므로 외람함을 무릅쓰고 감히 그 일의 즐거리만 쓰는 바이다. 아아! 슬프다. 그 효우 그 언론, 그 재덕 그 인품, 타고난 바탕으로 모두 다 갖추었으니, 마땅히 정상에 올라 그 풍부한 경륜을 펴서 이 나라 이 겨레를 복되게 할 것이어늘 어째서 불의와 독재, 겨레와 국토가 갈라진 참상을 그대로 둔채 아까운 나이에 눈을 감으셨는가! 그러나, 하늘은 결코 무심하지 않도다. 어진 부인이 있어 그 위대한 정신을 이어받아 그 미진한 일을 차분히 해나가고 있으며 아들이 또한 준수하고 성실하여 여망이 매우 크니, 필연코 그 남은 덕이 자손에게 돌아가 흐르는 경사가 영원히 무궁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