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302-6
- 탐방로그
-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 302-6에 위치한 조인원 선생 묘소를 찾았다. 조인원 선생은 조병옥 박사의 아버지 되신다. 조인원 선생의 묘소는 조병옥 박사 생가 뒷편 야산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교사에게 추천 이화학당에 학비면제 입학케 하였다. 1919년 3월 1일 민족의 분노가 폭발 서울에서 손병희외 33인의 주동으로 주권회복을 위한 시위운동이 전개되고 이 소식을 접한 공은 아우내에서도 이에 호응 봉기할것을 결심 군중동원이 용이한 아우내 장날인 그해 4월 1일 음 3월 1일를 봉기일로 정하고 교우들을 중심으로 동지들을 규합 태극기 제작등 만반의 준비를 완료하고 전날밤에도 매봉산에 올나 봉화를 신호로 재 다짐하고 당일 새벽 천안 진천 청주 3개 요소에 연락원을 보내 들어오는 동지와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배부 적극호응토록 하고 특히 천안방면에 배치한 2남 병호에게는 유일무이한 통신시설인 병천과 천안간의 전화선을 절단 두절케하였다. 공은 교우와 마을 사람들을 인솔 왜경주재소 앞으로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의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니 왜경이 혼비백산 주재소앞으로 쪼겨 총격을 가하고 이어 긴급출동한 왜군헌병대가 도착 비무장군중을 향하여 무차별 총격 또는 총검으로 난자 수십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으며 그 비참한 광경은 목불인견이었다. 공도 흉탄에 부상을 입고 진천병원에서 가료 중 왜경에게 체포되여 갖은 악행과 고문 끝에 공주지법에서 7년형의 선고를 받고 불복항소 2심인 서울 복심법원에서 3년 감형 옥중에서도 끊임업는 항일투쟁으로 한때 격리수용까지 당하고 고문의 여독으로 상처부위에서는 부패벌래가 나오는 등 갖은 고통을 격으며 형기를 맟이고 출옥하였으나 일제의 감시와 3년의 옥중생활로 가세는 기울고 호구지책도 곤란한 속에 한 많은 일생을 맟이신 애국지사이시다.
아드님이신 조병옥 박사의 이름과 손자이신 조순형 전 국회의원의 이름이 같이 있다.
묘소의 위치는 저 묘소들이 보이는 산등성이 넘어서이다.
조병옥 박사의 아버지 조인원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조병옥 박사 생가 뒷편 야산이라고 했었다.
김종식 선생의 설명으로는 생가 뒷편에서 왼쪽으로 한 골짜기를 넘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김종식 선생의 설명으로는 생가 뒷편에서 왼쪽으로 한 골짜기를 넘어가야 한다고 하였다.
김종식 선생의 설명대로 조병옥 박사의 생가 뒤쪽으로 가서 밭두렁을 타고 왼쪽으로 가야한다.
오른쪽 묘비가 독립 후에 조병옥 박사가 다시 세운 비라고 한다.
6.25당시 북한군이 반공주의자인 조병옥 선생 때문에 묘비에 총을 쏴서 저렇게 손상되었다고 한다.
6.25당시 북한군이 반공주의자인 조병옥 선생 때문에 묘비에 총을 쏴서 저렇게 손상되었다고 한다.
한양후인 조공 인원, 남양홍씨 ?성 지묘
아들 병옥은 이 한식의 절기를 가리어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덕을 추모하는 정성으로 이제 두 분이 안식하시는 이 무덤 앞에 이 비석을 삼가 세우나이다. 아버지께서는 저를 늦게 두신 까닭으로 유달리 저를 고이시고 선비의 셋쨌집이므로 살림이 그대지 넉넉지 못함에도 거리끼지 않고 저의 교육에는 특별히 유의하셔서 온갖 것을 애끼지 아니하셨읍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일생을 통하여 외에 굳세시사 불의를 미워하심과 작은 절개에 굽히어 큰 절개를 더럽히지 아니하시는 그 장부의 긔개는 자식의 처세에 크나큰 감화력이 되었나이다. 어머니께서는 집안의 갖은 파란과 빈궁 질병 그 모든 고초를 겪으시면서 저의 형제의 양육에 자모로서의 모범적 희생을 다하셨읍니다. 어머니의 가이 없으신 자비심 그 인정다우신 일생의 생활은 저의 대인접물에 큰 교훈이 되었나이다. 아들은 소년 때 부터 집을 떠나서 다른 지방에 또는 타국에 가서 근 이십년 동안 학문을 닦기와 그리고 왜적의 압박때문에 일어난 한 몸의 풍파를 말미암아 아버지와 어머니를 가까이 모시며 봉양함에 효성을 다하지 못하였고 아버지께서는 저의 옥살이하는 동안 한을 품으시고 돌아가셨읍니다. 이런 사실을 회고할 때에 아들의 마음은 더욱 슬프고 그 한은 창천에 사모치나이다. 그러나 두분의 형령은 안심하십시오. 우리 조선은 해방되었읍니다. 그리고 자주독립의 완성할 날도 멀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도 건국을 위하여 마땅히할 노력을 다하고 있읍니다. 저의 형제의 안해 둘과 십이명의 유손들이 다 충실히 활동하오며 혹은 학업에 힘쓰고 있읍니다. 단군기원 사천이백팔십일년사월이십사일
공은 한양인 고려중서공 지수를 시조로 제19조 휘 인옥은 이조개국공신 익 충정공으로 태고조때 배향된 문문의 후손으로 1868년 월일 선고 재혀과 선산곽씨의 3남으로 탄생하시다. 기골이 장대한 장사로 성품이 강직인자하며 의협심이 남달나 인근 주민에 존경의 대상이였다.또 독실한 기독교신봉자로 지령리마을에 감리교를 창립하고 속장직책을 맡아 교세확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의 안위가 풍전등화같음을 중시한 공은 일제상품의 불매운동등 항일투쟁에 앞장섰을뿐안이라 후세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 장남인 병옥을 도미 유학케하는 한편 교우들 자녀 유관순등 3명을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