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동면 수남리 133-3
- 탐방로그
- 이성하 선생 공덕비는 충청남도 천안시 수남2리 입구 도로변에 위치해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이성하 공덕비
조부께서는 전주이씨 광평대군 16세손 인항(모 안동김씨)의 아드님으로 1859년 11월 13일 충남 천안에서 출생하시어 기미년(서기 1919년) 4월 초하루(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봉기하신 애국소녀 류관순 열사와 민족학자이시며 의거현장에서 자당과 함께 순국하신 김구응 선생, 고 유석 조병옥 선생의 선친 조인원 선생 등과 같이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의거를 주도하셨다. 이 때는 이미 조부께서는 차녀를 유관순 열사 집안에 결혼하게 하여 류관순의 부친 류중권과는 사돈으로 지내면서 가사는 돌보지 않고 독립운동에 전념하셨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의거는 천안 전 지역과 진천.청주.오창.전의.안성 등지로부터 집결한 5.6천명의 대군중 의거로 일본관헌에 의하여 수백명이 체포 구금되었고 순국 및 희생된 선열은 18명에 달하였다. 이날 홍일선, 김교선, 한동규, 이순구, 조인원, 류관순 등이 병천면 아우내 장터에서 장날을 기하여 일으킨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워놓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명이 운집한 아우내 장터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여세를 몰아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주재소로 돌진하자 일본 헌병이 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일본 헌병과 수비대까지도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 류관순의 아버지 류중권 어머니 이소제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명이 부상당했다.조부께서는 전선으로 몸을 묶고 전신주에 올라 주재소 전화선을 절단하시다가 리본 헌병에 붙들려 현장에서 참혹하게 사지가 여섯부분으로 찢기어 순국하시었고 순국하신 시신을 뫼시는데도 일본관헌의 삼엄한 감시와 경계로 인하여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야음을 틈타 지게로 시신을 수습하여 겨우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이후 가산도 몰락하고 일본관헌의 감시로 인하여 자손들도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으며 모진 가난과 무지로 인하여 뒤늦게 조부의 고귀한 공적을 추서받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일본경찰과 맞서 싸우신 조부의 숭고한 애국심과 공을 기리어 1977년과 1982년에 대통령 표창장,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1993년 국가유공자증을 늦게나마 후손들이 대신 받을수 있었고, 현재는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모셔져 있다. (대한민국독립운동사 제1권 P.994 참조) 조부께서는 독립운동에 기여하시고 조국광복을 위해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여 31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시며 조국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아낌없이 바치셨기에 이 땅에 조국광복과 민족번영이 찾아왔고 지금의 아름다운 강산이 있기까지는 당신이 뜨거운 가슴과 드높은 민족해방의 의지가 합쳐져 가능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일신의 안위와 가족의 평안을 뒤로하고 우리 배달민족의 영원한 터전을 되찾으려 일제의 억압에서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치며 떠나가신 숭고한 삶을 이 땅에서 태어나 살아갈 후손에게 귀감이 되고 나라사랑하신 거룩한 뜻을 기리기 위하여 손자를 비롯한 후손들이 뜻을 모아 91년이 지나서야 공덕비(추모비)라는 이름을 빌려 조부의 거룩한 마음을 받들고 싶습니다.
2010년 9월 30일 손자 이순종 관종 건종 짓고 씀 후손 일동 건립
2010년 9월 30일 손자 이순종 관종 건종 짓고 씀 후손 일동 건립
천안시 동남구 동면 수남리 초입에 순국선열 이성하 선생 공덕비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마을주민에게 문의한 결과 수남2리 입구 도로변에서 찾을 수 있었다.
GPS상의 주소는 천안시 동남구 동면 수남리 133-3 이다.
GPS상의 주소는 천안시 동남구 동면 수남리 133-3 이다.
애국지사 이성하 공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