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희, 이강희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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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구성동 99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중학교 영어교사와 교감을 겸임 후세 교육에 힘써 오던 중 광복 1년 전인 1944년 8월7일 이역에서 46세를 일기로 힘겨웠던 생애를 마치셨다. 국가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형제지사는 조국광복을 위하여 항일투쟁으로 일생을 헌신하였기에 이 고귀한 생애는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宗員(종원)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워 崇慕(숭모)하고 追慕(추모)하고 思慕(사모)하는 정을 표하니
위대하신 아름다운 그 이름 千秋(천추)에 崇仰(숭앙)되어 빛나리라
2016년 병신 6월 傍孫(방손) 容夏(용하) 삼가 짓고 傍孫(방손) 大夏(대하) 題字(제자) 쓰고
仁川李氏恭度公派宗會(인천이씨공도공파종회) 會長(회장) 宗永(종영) 삼가 세움
'순국열사 대암 이태준 선생의 비' 하나만 있는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애국지사 비석도 있었다.
대구의 묘소를 찾았었던 지오 이경희선생과 동생되시는 해은 이강희선생 두 형제분의 공적비도 같이 있었다.
殉國烈士 大岩 李泰俊 先生의 碑 / 愛國志士 池吾 李慶熙 兄弟 功績碑
순국열사 대암 이태준 선생의 비 / 애국지사 지오 이경희 형제 공적비
愛國志士 池吾 李慶熙 兄弟 功績碑
(애국지사 지오 이경희 형제 공적비)
公(공)의 諱(휘)는 慶熙(경희) 號(호)는 池吾(지오)요 字(자)는 君善(군선)이며 本貫(본관)은 仁川(인천)이다. 贈大匡輔國崇祿大夫(증대광보국숭록대부) 領議政(영의정) 恭度公(공도공) 烏川(오천) 諱(휘) 文和公(문화공)의 19대손이요. 임난 팔공산창의대장 苔巖公(태암공) 諱(휘) 輈公(주공)의 11대손이다. 1880년 6월 11일 대구 無怠(무태)에서 아버지 諱(휘) 柄斗(병두) 어머니 慶州崔氏(경주최씨)의 3남2녀 중 맏아들로 태어나셨다. 1905년 한성 기호중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협성학교 및 金東三(김동삼) 선생과 함께 안동협동학교 등 여러 학교에서 교육구국에 힘써 오던 중 1910년 庚戌國恥(경술국치)를 당하자 한성에서 신민회청년학우회 한성지회의 일원으로 李東寧(이동녕) 李會榮(이회영) 尹琦燮(윤기섭) 金佐鎭(김좌진) 등과 독립군기지 창건을 위하여 서간도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주체세력이 되었다. 이해 8월에 중국 봉천성 장백현에 달신학교와 중국어학교를 세워 2세 교육에 힘썼으며 1912년 봉천성 무송현에서
중국인의 둔전 삼백일경을 租借(조차)하여 군자금을 만들고 조선청장년을 모아서 군사훈련을 시켜 광복군의 모체적 역할이 되었다. 기미 3·1운동이 좌절되자 길림성의 의열단에 참가 5월 義擧(의거)를 계획하고 국내로 잠입 金元鳳(김원봉) 장군을 중심으로 金祉燮(김지섭) 金始顯(김시현) 柳時泰(류시태) 洪鐘佑(홍종우) 黃鈺(황옥) 南廷珏(남정각) 劉錫鉉(유석현) 李賢俊(이현준) 白英武(백영무) 柳秉夏(류병하) 등 여러분과 모의하여 만주로부터 폭탄 36개 권총13정 폭탄장치용시계 6개 조선혁명선언서 및 조선총독부의 투항권고문 2,000매 등을 국내에 반입하여 거사 일보직전에 동지 12인과 함께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7년 2월 신간회 중앙회총본부 총무와 경북대구지회장을 겸임하시면서 30여 세포와 만 여 회원을 포섭 활약 중 밀양에서 검속되었다. 日帝末(일제말)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고향에서 광복의 시운을 기다렸다. 1945년 광복 후 과도정부 경상북도 부지사 1946년 1월 대구부 초대 부윤에 취임하였으나 군정의 비위에 환멸을 느껴 같은 해 6월에 사직하였다. 1946년 9월5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상북도 위원장 남조선경제신문사 사장 대종교남사도본사 宣範(선범) 등을 역임하는 등 한평생을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 바쳤으며 1949년 12월 4일 향년 70세로 생애를 마쳤다. 국가에서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海隱公(해은공)은 池吾公(지오공)의 친동생으로 諱(휘) 康熙(강희)이니 1899년 11월 2일 無怠(무태)에서 태어나셨다. 형 池吾公(지오공)을 따라서 간도를 거쳐 상해로 가서 몽양 여운형 선생의 도움으로 상해 호강대학교에 재학 중 兄(형)인 池吾公(지오공)의 의열단 사건으로 투옥되자 국내에 잠입 신간회 부산지회 총무 부산학우회 서무간사 부산협동조합장 등 민족운동에 진력하다가 1928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盧且用(노차용) 張澤遠(장택원) 鄭大鳳(정대봉) 등과 만주지역의 독립운동을 도우기 위해 비밀결사 「ㄱ」 黨(당)을 조직 활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2년의 옥고를 치른 뒤 중국으로 망명 龍井(용정) 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