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자형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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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관작리 산11
탐방로그
윤자형의 묘로 가는 길에는 안내판조차 없고 묘소는 산 속 매우 험한 곳에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단기 4324년 신미 5월 일
서울 성신여대교수 이현희 박사 고증
헌법재판소판사 김진우 근찬
평양후인 조승호 근서
예산군 예산읍 관작리 109-2 아미사.
윤자형 애국지사의 묘소를 안내해주실 증손자를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미사에서 차로 포장, 비포장이 반복되는 임도를 따라 올라왔다. 이곳이 묘소로 올라기는 길이라고 하신다.
안내판은 커녕 유일한 묘소 입구라는 표시는 이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뿐이다.
올라가는 길이라고 하지만 길은 없다. 마지막에는 매우 가판른 경사지였다.
이곳에 묘소가 있을것이라는 생각이 젼혀 들지않는 매우 험한곳이었다.
애국지사께서 왜놈이 보이지 않는 깊은 산중에 묘를 쓰라고 하셨다고 알려주신다.
正二品 嘉義大夫義兵大將 兼 湖南三道 大元帥 坡平尹公 滋亨 之墓
(정2품 가의대부의병대장 겸 호남3도 대원수 파평윤공 자형 지묘)
차령에 정기 받아 의병장 윤공 자형이 탄생하니 일명 자신 우 일명 태신이요 자 래경이요 호 오정이라. 경천위지할 큰 氣宇(기우)는 人中龍(인중룡)이라. 나라를 한 몸으로 지탱할야던 그 충의는 果是高麗統合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과시고려통합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 휘 신달을 비조로 척지 鎭國功臣門下侍中(진국공신문하시중) 문숙공 휘 관에 이어 壁上三韓三重大匡太尉(벽상삼한삼중대광태위) 휘 안비의 후예인바 기조 기손격으로 장렬한 기상으로 차령에 정기 받아 탄생하니 시조의 31세이라. 예산 파평 윤씨 일문에서 윤봉길 의사와 함께 오천년 민족 정의가 꽃폈도다. 장군은 1868년 8월 초9일 충청남도 예산군 오가면 전죽리에서 휘 의진과 경주김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 휘 상진에게 입양하였다. 휘 지욱 휘 광성 휘 병규는 그 고조 증조 및 조고시다. 1891년에 무과 급제 후 선전관을 지낸 충장으로 왜적에게 나라를 빼았기는 분함을 어찌 참으리오. 순사 구국 일념으로 의병을 모아 지리산에서 왜적과 싸우셨다. 고종 상황제께서는 한가닥 희망을 장군에게 거시고 1908년 7월 7일 밀사를 보내시어 가의대부 의병대장 겸 삼남도 육군대도독을 삼으시고 남삼도 대원수 군제사목 12조를 지어 보내셨다. 그 요지는 삼도군권대사를 경에게 일임하노니 단을 모아 하늘에 고하고 임진의병에 예에 따라 직인을 새겨쓰고 장관들을 임면하며 장병과 백성을 사랑하고 상벌을 엄정하게 하되 태만자 비협조자 백성을 침범하는 자는 참하고 공있는 자는 기록하라. 邪術(사술)에 현혹되지 말고 주색을 금하라는 등의 칙령이였다.

상황제께서는 한편으로 밀조를 삼남도민에게 내리시어 의사 윤자형이 군국의 위급을 血念(혈념)하여 의병을 모아 지리산에 주둔함을 가상히 여겨 삼남대원수를 봉했노라. 슬기있는 자는 꾀로써 돈 있는 자는 재력으로 돕고 합심단결 윤원수의 지휘에 따라, 왜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고 나라와 백성을 보존토록 하라 하시었다. 장군께서는 이곳 저곳 싸움에서 천추에 빛날 전공을 세우셨으련만 나라가 망한 전후의 일이라. 사서에 기록된 바가 없어 말없는 지리산만이 오늘도 높이 솟아 장군의 함성을 고히 간직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국치 후 만주지방으로 망명하여 김택영 신채호 이시영 이관구 등 제선생과 힘을 합하여 총독 격살 기획도 추진하시시는 등 많은 활약을 하시는 한편 원각교를 창설하여 포교를 내세워 광복운동에 힘쓰던 중 모종 임무를 띄고 국내에 잡입하였다가 1938년 12월 16일 조국 광복을 못 보신 채 가시었으나 1990년 건국공로포장을 추서받으셨다. 묘는 관작리위 향노봉 아래 서쪽기슭 양좌에 모셔있고 배위 이씨는 휘 영식의 따님으으로 일생을 의사의 아내답게 보내신 후 1926년 12월 24일 먼저 가셨다. 큰아드님 휘 용식은 안동권씨 사이에 문묘 장의 병만을 낳았다. 장의는 진기 정기 세기 세 아들을 두었고 장군님에 관한 사적을 밝히려는 효성이 절절하다. 둘째아들님 휘 은식은 성품이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한양조씨를 취하야 세 딸을 두니 오광환 정인섭이 그 사위이고 계자는 병두이다. 따님은 역시 성품이 지순하고 효행이 투철하였는데 광산김문의 영태에게 출가하였다. 충의의 문에 번영이 어찌 남닶지 않으리요. 자손만대에 영화무궁하려니와 장군이 묻힌 정충대의가 세상에 더욱 밝혀지고 오천만 겨레의 活素(활소)되어 남북통일의 대원이 하루빨리 이루어지이다.
애국의사 윤자형 선생 추모회 수
회장 예산군수 박종순
부회장 예산향교 전교 김치원
전 전교 이회봉
오산 이기봉
주비위원 유림 유긍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