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 춘추대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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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4-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다. 한마디로 선생은 오백년 왕조의 강상을 결국하신 만고의 충이요 천재역사를 붙잡아 이 겨레의 정기를 이어주신 백세유광할 한의 정화이시다. 선생의 겨레 위한 이 같은 훈적 앞에 우리 정부는 건국공로훈장 중장 제1호를 바쳤다. 선생의 유해가 모셔진 이 곳 예산땅 대흥 봉수산 일대 일찌기 선생께서 의병 선봉장으로 보내셨던 곽한일 남규진 장군 등이 이끌던 선생의 최초 의병이 투쟁하던 유서 깊은 곳 여기 선생이 계시고 그 의병의 충혼이 역역하니 이 곳을 지나는 겨레들이여. 다 같이 옷깃을 여미고 선생의 그 원 앞에서 다시 한 번 이 민족의 명운을 빌자.
1972년 동짓달 선생의 66주 제삿날
문화재위원장 하성 이선근 찬
국전서예 심사위원장 원곡 김기승 서
예산모현사업회 건립
면암 최익현 선생 묘가 있는 곳의 주소가 잘못되어서 몇 군데 거쳐서 찾아온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356-1 춘추대의비, 면암 최익현 선생 묘
최익현 선생 묘(崔益鉉 先生 墓) / TOMB OF CHOE IK-HYEON
■ 지정별 : 기념물 제29호 / ■ 소유 : 崔昌圭(최창규) / ■ 지정년월일 : 1982년 8월 3일 / ■ 규모 : 330㎡ / ■ 위치 :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 21-1 / ■ 시대 : 1910년 / ■ 수량 : 1기(基)
조선 말기의 거유(巨儒)이자 의병장 최익현 선생(1833~1906)의 무덤이다. 1907년 '논산군 상월면의 국도변에 무덤을 만들었으나, 참배객이 많자 일제의 명령으로 1910년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으로 옮겼다. 묘의 왼편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묘의 앞에는 석상(石床)이 놓여 있으며, 좌우에는 석주(石柱)가 있다. 묘의 입구에는 춘추태의비(春秋太義碑)가 화강석재의 대좌(臺座)와 이수(螭首) 오석(烏石)의 비신 등 3매의 다른 돌로 세워져 있다. 최익현 선생은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호는 면암(勉庵), 본관은 경주(慶州),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의 문인이다. 대원군(大院君)의 정치적 잘못을 상소하다가 대원군의 노여움을 샀고, 그 후에도 일본과의 통상조약, 단발령(斷髮令)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다 유배되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태인과 순창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항일 운동을 벌이다 잡히어 대마도(對馬島)에서 순절하였다.
勉菴 崔益鉉 先生 春秋大義碑(면암 최익현 선생 춘추대의비)
勉菴 崔益鉉 先生 春秋大義碑(면암 최익현 선생 춘추대의비)
배달겨레 4000년 역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한말 외세로 나라의 운이 기울고 침략으로 겨레의 명마저 끊이려 할때 이 겨레에는 한 큰 별이 있어 이울어가는 그 역사 위에 마지막 우뚝한 광망을 던졌으니 이제 그 빛을 기리어 우리는 면암 최익현 선생의 춘추의 얼과 충의의 자취를 삼가 여기에 싣는다. 선생의 성의 최, 휘는 익현, 자는 찬겸, 호는 면암이시다. 라말 거유 최치원의 후예이시다. 1833년 경기도 포천현에서 가난한 선비 휘 대의 아들로 태어나시어 1906년 적의 땅 대마도 인관에서 굶어서 순국하시기까지 실로 선생이 걸으신 74세 일기는 그대로 파란 많은 우리 근대사의 별장 바로 그것이었다. 일찌가 화서 이항로의 문하에서 위국위도의 큰 뜻을 닦으셨고 오직 봉양의 효성으로 세우신 출임에의 길이 명경문과에서 순통으로 급제하였을때 이미 이효사충 진충보국에의 높은 지조를 굳게 다짐하였다. 1855년 승문원 부정자에서 출발된 선생의 관직은 순경원수봉관, 사헌부시평사, 연원정언 이조정랑, 신창현감, 사헌부 장령, 돈녕부 도정승정원증시 등을 거치는 동안 숱한 위공애민의 의표를 남겼으니 양민을 괴롭히는 감사의 명에 따를수 없어 홀연히 신창현감의 관직을 버렸을 때 길을 맊고 원류하는 백성들의 가슴속에는 선정목민의 산 표본을 남기셨으며 사헌부 장령시에는 감연히 당시의 비정을 비판하는 시폐4조 상소를 올림으로써 세도정치로 맊혔던 조선조 언관의 기백을 다시 떨쳤다. 고종 10년 서슬 푸른 대원군의 세도를 꺾었던 저 유명한 계유년 상소는 이땅에서 처음보는 입기명륜의 드높은 기상이었으며, 1876년 일제가 힘으로써 불평등한 병자조약을 강요하여 왔을때 도끼를 메고 광화문에 나아가 올린 저 척화오조상소는 나라의 자주와 민족의 생로를 외치신 높고도 푸른 춘추정신의 발현이었다. 그 후 선생은 공조판서, 의정부 찬정, 궁내부 특진관 등에 임명되시고 1902년 정헌대부에 올르신 후 다시 경기도 관찰사에 제수되였으나 이를 모두
세번 네번 사직상소를 올려 사퇴하셨으니 가위 선생은 이 나라 선비 중의 선비셨다. 을사에 이르기까지 전후 십수차에 걸쳐 올리신 자강상소들은 기우는 이 나라를 붙잡으려는 마지막 의로운 경종이었고 1904년 국왕께 독대할 때 시국을 통곡하시며 국권의 자주와 일화 차관의 거부와 외세의존의 불가함을 눈물로서 간하신 이른바 오조신부는 그 충성어린 자자구구마다 귀신도 감읍케 한다. 1905년 봄 왜적은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으려는 준비작업으로 국가 원로이신 선생을 왜 사령부로 왜헌병로 거듭 감금시켰으나 차라리 나라 없는 삶은 나라 있는 죽음만 같지 못하다는 선생의 저 청청한 의기는 왜적의 총칼로도 꺾지 못했다. 드디어 1905년 저 을사조약으로 이 나라 천지가 밖기고 이 겨레의 역사도 닫히려 할때 74년간 한번도 꺾임없이 지켜왔던 선생의 마지막 얼은 그 불굴의 의에 분노의 불을 당겨 겨레 위해 타는 의병민족운동의 횃불로 피어올랐다. 조약폐기와 오적참살의 분노를 상소로 외치시고 초적의 대의를 밝혀 병자수호조약 이래 일제의 죄상을 낱낱이 꾸짖는 기 일본 정부 서를 왜공사관에 보내신 다음 온겨레의 항일 봉기를 호소하여 포고 팔도사민의 격문을 뿌리셨다. 30여년 쌓여온 일제의 침략상을 파헤친 저 16개조 토죄문은 왜적의 간담도 서늘케 하였고, 자주대한의 민이여 적에게 굽히고 살기보다는 차라리 애국을 앞세워 싸우며 죽자는 저 포고문의 귀절에서는 민족의 피가 끓어 올랐다. 그러나 당시 이름있던 사람과 당상들에 보냈던 눈물의 거의 호소가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하자 선생은 드디어 1906년 윤 4월 호남땅 태인에서 우선 임병찬 등 문인들과 더불어 의로운 기백을 꽂으셨다. 수개월간 수십차의 혈맹으로 더욱 불어난 선생의 의진은 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 임현주, 임종규, 양재해, 조우식, 조영선, 최재학, 나기덕, 이용길, 유해용 등이 이른바 13의사를 비롯한 의군 800이었으며 태인, 정읍, 순창, 곡성 등 전라 일원을 누빈 구려 항쟁 끝에 다시 순창 땅에 들어왔을때 왜적 아닌 동포 진위대의 포위를 당하게 되었다. 애닲다. 포위한 적이 어찌 왜군 아닌 동족일 줄 았았으랴. 이에 선생은 차마 동족상멸 상의 비극을 펼 수 없어 의병에게 총질을 멈추게 하셨다. 여기서 젊은 의사 정시해는 총탄에 맞아 쓸어지고 순의를 기다리며 끝까지 선생을 모시던 13의사도 포박을 받고 말았다. 아! 선생의 충절에는 이같이 의가 따르고 인이 넘쳤다. 선생께서는 보이신 그 충과 절과 의와 인에서는 바로 이 겨레의 새로운 생명력이 이어져 나왔으니 춘추의 정신은 오늘도 병오년 선생의 의병을 의연히 우리 한민족의 승리로 기록하고 있다. 선생은 전라의병에서만이 아니고 홍주의 민종식 의병에게는 문인 의사 일단을 파견 그 세를 독려하셨고 강원, 충북에서 오래 계속되었던 저 유인석의 의병운동도 끊임없이 지도 격려하셨으며 또 선생의 의병 뒤에서는 문인 노응규 등 수많은 우뚝한 의병들이 줄이어 따랐으니 실로 선생은 한말의병의 총사요 광복운동의 원훈이셨다. 의병에 패하신 후 선생은 적지 대마도에 갇히신 몸으로도 적이 주는 한 알의 쌀과 한 모금의 물마저 물리치고 74세 일기를 들어 아사 순국으로 겨레 앞에 바치셨으니 때는 1906년 음 11월 17일 새벽 하늘에 일성장명도 함께 떨어지던 인시였다. 오호 선생이 가셨을때 조선왕조도 막을 내렸고 오백년 이 나라 사림의 명맥도 끊겼다. 물 한 모금마저 물리친 충은 송의 문천상보다 더하고 외적에 저항하신 의는 려말의 정포은과도 다르며 무장 아닌 선비로서의 거의 순국은 조중봉과 이충무공 이후 이 겨레 항일투쟁사에 큰 한 빛을 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