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공원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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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 647-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4월 3일 한내장 4.3독립만세운동기념행사에서 대의사 현판 제막식과 인.장 양의사 영정 봉안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니 이만우 기념사업회장이 이룩한 꿈의 결실이었다. 이회장의 꿈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대의사 주변을 공원화하려는 포부를 가지고 2009년 11월 6일에 군비 2억원을 지원받아 주변 주택을 매입해 들였는데 이회장의 공익사업에 감동한 이웃의 협조가 큰 몫을 차지했다. 부지가 확장되자 이회장은 그 안에 6.25 참전국가유공자 기념비를 세우기로 작정하고 추진위원장을 맡아 급속히 진행해갔다. 그 과정에서 필자는 다시 6.25 참전국가유공자 기념비기를 지어야만 했다. 이 기념비는 2010년 6월 대의사 광장 안에 건립되었고 25일에 제막하였다. 다시 이해 12월에 군비 6천5백만원을 지원받아 야외무대설치와 광장잔디 포장공사를 마무리 지었다. 공원화 진행의 수순이었다. 2011년 4월 3일에 이회장은 출향인사들의 고향 생각을 자극하기 위해 애향회를 창설하여 초대회장을 맡으면서 1천만원을 출연했다. 출향인사들의 후원으로 기금을 조성하여 고덕면 현안사업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다시 2011년 11월에 이회장은 군비 2억 1천만원을 지원받아 대의사 조경과 담장 설치를 완료하고 기념탑 옆의 민가 한 채를 매입하여 부지를 확장했다. 2013년 2월에는 대의사 주변 토지 400평을 한내장 4.3독립만세 기념사업회에서 경매로 매입해 보태니 이것이 현재 대의사 광장 규모이다. 한가지 더 보탤 일은 2002년 6월 이만우 의원이 군의원 당선 직후에 사유지였던 대의사 뒷산 재물 봉정상을 군비로 매입하게 하여 서울 건축업자의 빌라건축을 막은 사실이다. 행정협의회에서 각 기관단체장들의 협조를 얻어 허가 출원을 반려하고 지주를 설득하여 군에 땅을 팔도록 하였다. 그래서 정상에 육각정인 관덕정을 짓고 산책로에 조명등과 확성기를 설치하기까지 했다.

그리정에서 필자는 2006년 1월 29일 관덕정기를 짓기도 했다. 만세공원 조성을 염두에 둔 행보였다. 모두 이만우 회장이 주도하여 만 10년 동안 이루어낸 일이다. 본인은 군의원과 조합장으로 선출해 준 고덕면민에 대한 보답으로 마음먹은 일이라 겸양하지만 진정 자치를 존중하는 투철한 자존의식과 정의를 구현하려는 대의 실천 정신이 없었다면 주심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2017년 6월 12일에 이만우 회장이 느닷없이 간송미술관으로 필자를 찾아와 대의사 주변일대를 공원화했으니 이름을 지어주어야 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후진들이 뜻을 모아 공원조성 공덕비를 세우려 한다는데 아무리 알려도 듣지 않고 아마 준비를 끝낸 것 같다면서 필자가 그 비문의 찬술을 맡아주었으면 한다고 조심스럽게 부탁한다. 즉석에서 쾌락했다. 당연히 이런 선도적인 향토문화창달행적은 기록되어 역사로 길이 남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공원을 만세공원이라 이름하고 고덕만세공워너 조성 사적비를 위와 같이 지어냈다. 만세공원이 조성되는 과정만 간략하게 나열하였을 뿐인데 이만우 선생의 공적이 곳곳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만세공원이 존재하는 한 이만우 선생의 명성은 이 만세공원 조성 사적비와 함게 남아 여원히 빛날 것이다.
2017년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장 가헌 최완수 경찬 / 동방한문연수원장 월천 권경상 근서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 647-4 고덕만세공원 사적비를 찾아왔다.
대의사(大義祠)
고덕만세공원 조성 사적비(古德萬歲公園 造成 事蹟碑)
古德萬歲公園 造成 事蹟碑(고덕만세공원 조성 사적비)

사적을 기록하면 역사가 되고 역사는 쌓여서 문화를 이룬다. 선현들이 사실 기록을 돌 위에 새겨 오래 보존하려했던 뜻이 여기에 있다. 이에 우리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대천리에 만세공원이 조성되는 전말을 비석에 새겨 향토문화유산으로 남기려 한다. 만세공원터는 1919년 기미 4월 3일 한내장날에 고덕 봉산 덕산 삽교면 천합덕동의 내포주민 3천여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헌병에게 무참히 짓밟히던 그의 거의 현장인 한내장터이다. 이 곳에서 인한수 의사는 의병의 칼날 아래 순국하였고 이를 목도한 항의 대중들은 만세소리로 왜병의 기세를 제압하였다. 이 의거사실을 기리기 위해 1976년 4월 2일에 고덕 봉산 덕산 삽교동 고덕 인근 주민들은 성금을 모아 인한수 의사 현충비를 고덕면사무소 앞에 세웠다. 이후 고덕면사무의 이전으로 인한수 의사 현충비가 대천리 장고개의 개인 소유땅으로 옮겨지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이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해오던 이만우 선생은 2002년 6월에 예산군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자 안의사 현충비를 만세순국현장으로 이전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이찬용 당시 고덕면장과 계획하여 2003년 3월 11일에 4.3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 및 고덕면지 편찬위원위를 구성하였다. 이의원은 스스로 고덕면지 편찬위원장을 맡고 한내장 4.3독립만세운동 기념사업회 초대회장으로 이명범 회장을 추대하여 문화사업추진단의 진용을 갖춘 다음 당시 군수였던 고덕 출신 박중순 군수로부터 옛 고덕 보건지소자리 135평을 한내장 4.3독립만세운동기념탑 부지로 사용하는 승락을 받아냈다. 이만우 편찬위원장과 이명범 기념사업회장이 각 1천만원씩 출조하고 최병모 번영회장이 300만원의 성금을 내어 이를 기금으로 135평 대지 위에 한내장 4.3독립만세운동기념탑을 건립하고 인한수 의사 현충비를 이전한다.

그리고 2003년 4월 3일에 한내장 4.3독립만세운동기념탑을 제막하는 제막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기획한 지 한 달 미만에 번갯불처럼 신속하게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만우 위원장이 기념탑 제막식 7일 전에 급박하게 필자를찾아와 기념탑 기의 제작을 강청하여 하룻밤 사이에 급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했다. 기념탑 건립장소는 기미년 4.3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옛날 한내장터로 당시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가 있던 의거의 현장이라 그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곳이었다. 한내장 4.3독립만세운동기념탑의 제막식을 겸한 기념행사를 새 자리에서 성대히 치르고나자 이만우 위원장은 더욱 자신감에 넘쳐 고덕면지의 발간을 서두르게 되었다가 기념탑 기찬술의 인사를 핑계삼아 이찬용 고덕면장과 이제상 선생을 대동하고 간송미술관으로 필자를 찾아와 먼저 집필과 편집을 총괄해 달라는 청탁을 한다.
불상 연구와 겸재연구 사사연구 현재 연구불상 조성대학 강의 TV강연 간송미술관 정기전시회 준비 등으로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했던 필자는 절대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정을 말하고 정중하게 사절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찾아와 간곡히 부탁하니 백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 우선 총사의 집필을 수락하니 이만우 위원장은 7월 25일 고덕면사무소에 고덕면지 편찬위원회 총회를 소집해 놓고 필자를 초빙하여 그 사실을 공표하게 한다. 주도면밀한 작전이었다. 이런 일에 대비하여 수십년동안 고향 관련 사료들을 눈에 띄는대로 뽑아 놓았었기에 감히 집필을 수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밤잠을 줄이면서 쉬지 않고 엮어내는 에 몰두했으나 2006년 12월 10일에 가서야 겨우 탈고할 수 있었다. 이도 이만우
위원장이 2006년 5월에 군위원 임기를 마치고 한내장 4.2만세운동 제2대 기념사업회장으로 취임하면서 고덕면지 출간이 해를 넘길 수 없다고 수시로 재촉해서 조선 순조 1년(1801) 신유 사옥까지 언급하고 줄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면 단위의 지방역사라 하나 국사의 흐름과 무관하게 전개되는 것이 아니니 상호 관련성을 규명하며 엮어나가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우리 역사를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려는 필자의 역사관과 고려 이전을 불교사관으로 이해하고 조선시대를 유교사관으로 평가하려는 융합적인 역사 서술 방식이 읽기는 쉬우나 쓰기는 어려워서 시간을 지체하게 했는데 년월은 물론이고 날짜까지 밝히려는 실증적인 태도가 더욱 이를 부채질했다. 그 결과 고덕면지는 출간 이후 찾는이가 많았다 한다. 이만위 위원장의 패기와 헌정과 인내가 이루어낸 결실이라 하겠다. 2007년 1월 10일 방한일 면장의 주선으로 고덕면지의 출판기념회를 성대하게 치르고나자 이만우 위원장의 신망은 더욱 높아졌다. 이에 제2대 한내장 4.2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 회장직에만 전념하게 된 이만우 회장은 윤관호 사무국장과 함께 사업회 발전에 총력을 기울인다. 그 결과 2008년 1월 18일에 인한수 장문환 양의사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한 사우 건립비로 군비 2억 도비 2억 국가보훈처 1억 2천 7백만원 등 도합 5억 2천 7백만원의 지원을 받았다. 2008년 11월 16일 사우를 준공하자 이만우 회장은 이제상 선생과 윤관호 사무국장 등과 함께 필자를 찾아와 그 이름과 현판 글씨와 기문을 함께 지으라 한다. 사양해야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했으로 쾌락하고 여러날 고심끝에 대의사라 이름짓고 2009년 1월 1일에 대의사기를 지어 당대 명필인 외우 남우 원중식 선생에게 특청하여 기문과 현판 글씨를 써 주도록 부탁하였다. 드디어 200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