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아산시 영인면 월선리 산60-5
- 탐방로그
- 이규갑 선생의 묘는 아산시 영인면 월선리 산 60-5에 위치한다. 충남 아산시 영인면 월선리 346-2 피나클랜드 옆산 정상으로도 주소가 알려져 있으나, 어느 산이 옆산을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해당 주소로 검색하면 된다. 산 속에 위치하므로 가장 가까운 곳까지 차량으로 이동하여 산으로 올라오면 선생의 가족묘를 찾을 수 있으나, 길이 험하므로 유의하여야 한다. 묘역에는 선생의 부친인 이도희 선생의 묘가 있고, 이규갑 선생의 묘는 그 옆에 위치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운호 이규갑선생은 덕수인이니 선조조 원훈 성웅 충무공의 후이다. 1888년 11월 5일 아산 공세리에서 통정대부 휘 도희의 차남으로 나시니 모부인은 숙부인 밀양박씨이다. 약관시절에 임이 항왜의병대열에 서고 그 뒤 기독교 사상에 공명하여 목회성직과 아울러 신교육사업을 이르키니 공주 영명학교와 기성상업학교는 선생이 설립한것이다. 191919년 3.1운동에는 애국지사 민강선생의 서울 서소문외 순화동저택을 책원지로 여러 혁명지사들과 3.1운동전후를 통하여 대채로운 계획을 수립 실천하니 한성정부를 산출한 국민대회의 조직은 현저한 공적의 하나이다. 상해임시정부 에는 충청남도를 대표하여 초대의정원 의원이 되어 초병기 공헌한바 컸으며 1920년에 재 만주국경 언운둔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배달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서배리아 선교처의 일도 돌보시다 1927년 군자금 조달차 입국하였다가 신간
회에 가입 경동지부장이 되었고 선교와 육영에 힘쓰면서 일제와 싸워 누차 옥고를 격꼈다. 1945년 8.15해방후는 정치활동에 주력하니 대한민족 대표자회의 대의원으로 건국사업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박사와 합작하였고, 향리 아산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여 국회문교분과위원장에 임하고, 대한국민당 최고위원, 애국동지원호회장, 건국대학 명예학장, 한중협회장등 공직을 띠고 다방면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을 수하고 말년까지 민주공화당 총재고문등 부단히 사회활동에 참여하시다가 1970년 3월 20일 장서하시니 향년이 83이시다.
선생의 초배 전주이씨는 시종 춘식의 녀로 장남 민철을 생하고 속배 김해김씨 엘라여사는 기독교 전도사 락권의 녀로 차남 민광, 3남 민휘를 생하다. 민철의 자는 신영, 남영, 문영이요 미광의 자는 수영이요 민휘의 자는 일영, 원영이다. 선생의 부음이 전하자 국가원수를 비롯하여 각계인사의 공론으로 선생의 전에 국가민족에게 봉사한 공로에 보하기위하야 사회장으로 결정하니 이는 실로 국민여론을 반영한것으로서 장례위원장은 전대통령 윤보선, 33인의 1인인 이갑성공을 비롯하여 삼정수뇌, 종교 문화 교육 언론 여야정당 실업계등 각계 대표인사 700여명이오 영결식은 7일장인 3월 26일 장례위원장인 곽상훈 전국회의장의 사식으로 기독교 감리교 변홍규감독의 주례로서 서울 종남산 중복에 자리잡은 숭의여자고등학교정에서 국군악대의 조곡과 수 많은 시민과 학생들의 봉도하는 가운데 엄수되고 당일 고향 아산으로 운과도중 온양역전에서 아산군민의 제사를 받었고 선산인 월선리 응봉산 중복 선좌 걸향에 안장하다. 충무공을 정점으로 하는 5세 7충의 전통적 충의정신은 광복후 독립운동 유공자로써 건국공로훈장을 받은분이 일문중에 7인이 되고 이 7인중에는 선생과 선생의 초배인 전주이씨가 포함되었으니 타에 예를 볽수 없는 놀나운 사실로써 만인의 담배를 받어야
선생의 초배 전주이씨는 시종 춘식의 녀로 장남 민철을 생하고 속배 김해김씨 엘라여사는 기독교 전도사 락권의 녀로 차남 민광, 3남 민휘를 생하다. 민철의 자는 신영, 남영, 문영이요 미광의 자는 수영이요 민휘의 자는 일영, 원영이다. 선생의 부음이 전하자 국가원수를 비롯하여 각계인사의 공론으로 선생의 전에 국가민족에게 봉사한 공로에 보하기위하야 사회장으로 결정하니 이는 실로 국민여론을 반영한것으로서 장례위원장은 전대통령 윤보선, 33인의 1인인 이갑성공을 비롯하여 삼정수뇌, 종교 문화 교육 언론 여야정당 실업계등 각계 대표인사 700여명이오 영결식은 7일장인 3월 26일 장례위원장인 곽상훈 전국회의장의 사식으로 기독교 감리교 변홍규감독의 주례로서 서울 종남산 중복에 자리잡은 숭의여자고등학교정에서 국군악대의 조곡과 수 많은 시민과 학생들의 봉도하는 가운데 엄수되고 당일 고향 아산으로 운과도중 온양역전에서 아산군민의 제사를 받었고 선산인 월선리 응봉산 중복 선좌 걸향에 안장하다. 충무공을 정점으로 하는 5세 7충의 전통적 충의정신은 광복후 독립운동 유공자로써 건국공로훈장을 받은분이 일문중에 7인이 되고 이 7인중에는 선생과 선생의 초배인 전주이씨가 포함되었으니 타에 예를 볽수 없는 놀나운 사실로써 만인의 담배를 받어야
마땅하려니와 선생은 그 7인중에도 대표적이오 활동범위와 폭이 넓었으니써 독립운동자로 건국공로자로서 그 위치가 자명하리라 믿는 바이다. 념원하시던 국토의 통일은 보지 못하였으나 선생의 고매한 인격 투철한 사상은 기리 이 겨레의 교훈으로 남을것이다. 오호라 불초성기 상통하던 동지의 비문을 초함에 파란만장하던 과거를 회억하며 현하의 복잡 미묘한 국제정세하 한난한 국사를 굽어 살피매 만단저회를 금할길없다. 업드려 선생의 유지가 밝양되기를 바라고 명복을 빌면서 이 붓을 놋노라.
1970년 5월 철기 이범석장군이 이글을 짓고,
예안후인 이용무가 이글을 쓰다.
1970년 5월 철기 이범석장군이 이글을 짓고,
예안후인 이용무가 이글을 쓰다.
이규갑선생과 부인의 묘와 비석이 서있었다.
덕수이공 규갑 지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