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3.1운동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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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산42-7
탐방로그
양성3.1운동기념탑을 찾기 위해 경기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산42-7에 왔다. 해당 사적은 칠곡교회 바로 뒷쪽에 위치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경기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산42-7 칠곡교회
3.1독립기념탑은 칠곡교회 바로 옆 뒷쪽에 있다.
舊 3.1운동기념탑 안내문
■ 현황
○ 소재지 :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 산42-7번지 / ○ 부지면적 : 1,684m2
○ 소유자: 안성시 / ○ 시설물 : 기념탑 1기 / ○ 건립일: 1984. 4. 1
■ 이 고장의 3.1운동 개요
○ 본 기념탑은 원곡면사무소에서 동북방으로 약 2Km와 만세고개인 안성 3.1운동기념관으로부터는 서남방으로 약 2.5km에 위치하고 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으로 이곳 원곡면에서도 1919년 3월 28일부터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연일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 1919년 4월 1일 저녁 8시에는 원곡면민 1천여명이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이 앞길을 거쳐 당시 일본관헌이 주재하고 있었던 양성면으로 행진하여 양성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등을 불태웠으며, 이밖에도 전화선, 전주를 절단하고 일본인상점 3동을 파괴하였다.
○ 또한 1919년 4월 2일 원곡면사무소를 불태웠으며 평택의 경부선 철도을 파괴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추격으로 중단되었다.
○ 1919년 4월 20일 일본 헌병대는 기만과 위협으로 고문, 학살, 방화, 투옥 등 만행을 자행하여 피살된 애국지사가 13명이었고 고문에 의해 목숨을 잃는 지사가 5명에 달했으며 옥고를 치룬 투사만도 127명으로 황해도 수안면, 평안북도 옥상면의 만세운동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격렬했던 항쟁지이다.
○ 따라서 원곡면에서는 1984년 4월 1일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기념탑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 원곡면 칠곡리 이종락 유족회원의 땅을 회사받아 기념탑 및 사료관을 건립하여
○ 이곳 기념탑에서 1985년 3월 1일부터 2001년 3월 1일까지 매년 안성 3.1운동기념식을 시행하였으나 2001년 11월 17일 만세고개에 안성3.1운동기념관 및 기념탑을 건립함에 따라 이곳에 전시되었던 사료를 기념관으로 옮겨 보존하고 3.1운동기념식도 그곳에서 갖게 됨에 따라 ○ 2004년 3월 현 기념탑은 원곡면의 요청으로 기념탑 보수 및 편의시설 설치로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 원곡, 양성 3.1운동 선양회 -
三一運動紀念塔(삼일운동기념탑)
三一運動紀念塔(삼일운동기념탑)
유구한 역사를 전개시켜 오던 우리 민족이 일제 침략으로 국권을 탈취당하여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일제의 식민지화 하면서 자유가 박탈되고 문화가 파괴되었다. 일제의 혹독한 무단통치와 헌병 경찰의 지독한 강압은 날로 더욱 심해졌다. 그 같은 고난 속에서도 자유창조 개혁정신의 민족적 맥락을 계승해온 우리 민족은 굽히지 않고 조국의 광복을 위한 국권회복운동을 꾸준하게 전개하여왔다. 특히 1차대전 후 민족자결주의라는 시대의 진운에 맞추어 1919년에는 거족적인 3.1운동을 일으켰으며 민족의 염원인 국권회복을 위한 국내외 동포의 독립운동으로 확산시켰다. 이때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에서도 모두 나가서 대한독립만세의 시위운동을 일으켰다. 원곡면에서는 4월 1일을 기하여 밤 8시경 면사무소앞에 1,000여 명의 면민들이 모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무르면서 사람마다 등불과 횃불을 들고 양성면쪽으로 야간행진을 하였는데 마침 양성면에서도 이미 독립만세를 부르던 군중들과 합류하게 되었다. 이에 더울 위세를 얻은 군중들은 조국의 광복을 부르짖으며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시위군중들은 우리 민족은 반드시 국권을 회복하여야 된다고 결심하고 혼연일체가 되어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보여주었으며 일제 침략기관을 없애야 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시위군중을 향하여 총을 쏘며 야만적으로 탄압 살상을 하였다. 그렇지만 면민들은 민족혼으로 뭉쳐 격렬하게 대항하면서 일경주재소와 우편소 등 식민통치기관을 파과하는 등 3.1운동이 전개되는 중에 가장 처절한 충돌지역의 하나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면민 중에는 피살 순국되거나 체포 구금되어 고문 치사되었으며 서대문형무소까지 연행 옥사되는 등 귀중한 생명을 희생당하였다. 옥고를 치룬 분도 132인이나 되는데 12년 형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이토록 숭고한 애국선열의 자유독립정신을 영원히 계승하여 자손만대에 기리고자 면민들이 정성을 모아 유서깊은 이곳에 기념탑을 세우게 되었다.
1983년 광복절 이현종 문학박사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글 짓고 연봉 장은봉 글씨 씀
옥고 선열록(옥고순)
이유석(주동) 이근수 이덕순 홍창섭 윤영삼(옥사) 이유복 조경수 이희룡 최은식 김순서 김중식 이양섭 이흥길 고인재 김봉현 김영서 김영희 소휘옥 오세학 오윤선 이규완 이상신 이인군 정인규 정주하 정호근 최관길 한재호 김선경 김희식 오세경 이금철 강봉세 김배관 김시연 박용업 소휘태 손정봉 송우필 송재필 원지성 오복영 오창선 이병렬 이석렬 이완호 이유만 이유찬 이유항 이준기 이진영 이태영 이화영 장덕관 주주봉 최병일 최재식 한응교 함천봉 허병주 강봉돌 김백봉 김정원 김종상 남시우 박동돌 박정식 박천봉 안철재 오정근 이국상 이규동 이규철 이병구 이병문 이병오 이병철 이유길 이인영 이종만 이중립 이한영 이홍렬 장원심 전수만 정일봉 최만종 허덕성 홍경운 홍재의 김영하 김원순 김창섭 남상훈 남장우 박옥동 소휘선 염만흥 오윤선 오익삼 윤종건 이한기 이규도 이발영 이부성 이상근 이상옥 이석근 이순기 이승익 이오영 이유원 이유직 이찬영 임성운 정봉안 조병훈 최기용 최만보 최찬섭 최창용 홍병각 홍정표 권중옥 서병돈 서완득 이규창 이대근 이영우 이종익 최문섭 최병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