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김삿갓면 옥동리 221-3
- 탐방로그
- 영월군 하동면(김삿갓면) 옥동리 221-3 아리랑장터 공원에 백우 김상태 의병장 전적비가 건립되었다. 백우 김상태 의병장 전적비는 김상태 의병장 사당인 충의사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세움 영월군 최명서, 영월군의장 손경희, 영월문화원장 엄흥용
도움 삼척 김씨 영월종친회장 김몽영
빗돌 글 엄흥용, 빗돌 글씨 주명섭, 조각 김병철
도움 삼척 김씨 영월종친회장 김몽영
빗돌 글 엄흥용, 빗돌 글씨 주명섭, 조각 김병철
영월군 하동면(김삿갓면) 옥동리 221-3 아리랑장터 공원에 백우 김상태 의병장 전적비가 건립되어서 찾아가는 중이다.
원래에는 이곳의 면 이름이 김삿갓면이 아니고 하동면이었지만, 면의 이름이 바뀌었다.
김삿갓 옥동리 마을 마을소개
김삿갓의 면 소재지입니다. 예밀리 밀동은 1167년 교려시대 밀주의 청사가 있었던 곳이며, 그 당시 죄인들을 가두던 감옥이 옥동리 옥동중학교 자리에 있었습니다. 옥이 있었던 마을이르모 '옥동(獄洞)'이라고 했으나 어감이 좋지않다고 하여 '獄洞->玉洞'으로 고쳤습니다. 김삿갓면은 2009년에 하동면에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옥동중학교와 파출소, 농협, 우체국 등의 행정관서가 있습니다. 옥동리에는 구한말 의병장으로 명성을 날렸던 삼척김씨 백우 김상태장군의 사당이 있었으나 관리 소흘로 없어졌고 1993년 그 자리에 '순의비'를 세워 그의 높은 공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김삿갓의 면 소재지입니다. 예밀리 밀동은 1167년 교려시대 밀주의 청사가 있었던 곳이며, 그 당시 죄인들을 가두던 감옥이 옥동리 옥동중학교 자리에 있었습니다. 옥이 있었던 마을이르모 '옥동(獄洞)'이라고 했으나 어감이 좋지않다고 하여 '獄洞->玉洞'으로 고쳤습니다. 김삿갓면은 2009년에 하동면에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옥동중학교와 파출소, 농협, 우체국 등의 행정관서가 있습니다. 옥동리에는 구한말 의병장으로 명성을 날렸던 삼척김씨 백우 김상태장군의 사당이 있었으나 관리 소흘로 없어졌고 1993년 그 자리에 '순의비'를 세워 그의 높은 공적을 기리고 있습니다.
김삿갓 아리랑장터 입구
행복한 나눔마을 옥동리
행복한 나눔마을 옥동리
白愚金尙台義兵將戰蹟碑(백우 김상태 의병장 전적비)
白愚金尙台義兵將戰蹟碑(백우 김상태 의병장 전적비)
백우 김상태 의병장 전적비(白愚 金尙台 義兵將 戰蹟碑)
영월은 항일 의병항쟁의 중심지로 1895년 의암(毅菴) 류인석(柳麟錫) 의병장은 영월 관아(官衙)의 문루(門樓)에 '복수보형(復讐保形)'의 깃발을 높이 걸고 '영월을미의병(寧越乙未義兵)'을 창의하였다. 그리고 1905년 삼계(三戒) 원용팔(元容八) 의병장도 주천에서 을사의병(乙巳義兵)을 일으켰다.
김상태 의병장의 휘(諱)는 상호(尙鎬), 자(字)는 경륙(京六), 호(號)는 백우(白愚)이다. 본관은 삼척으로 삼척군(三陟郡) 추(錘)의 28세손으로 1862년 충북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태어나 친척인 김명호(金明鎬)가 살고 있는 영월군 김삿갓면 옥동리로 이주하였다.
1907년 운강(雲岡) 이강년(李康秊) 의병장은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주천 강변에 돌단을 쌓고 의병들의 군례(軍禮)를 받으며 '주천정미의병(酒泉丁未義兵)'의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이 되었다. 이때 주천으로 모인 의병진은 40여 부대나 되었다. 주천정미의병에서 중군장(中軍將)을 맡은 김상태(金尙台) 의병장은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작전으로 일본군 제47연대장 '이쿠
영월은 항일 의병항쟁의 중심지로 1895년 의암(毅菴) 류인석(柳麟錫) 의병장은 영월 관아(官衙)의 문루(門樓)에 '복수보형(復讐保形)'의 깃발을 높이 걸고 '영월을미의병(寧越乙未義兵)'을 창의하였다. 그리고 1905년 삼계(三戒) 원용팔(元容八) 의병장도 주천에서 을사의병(乙巳義兵)을 일으켰다.
김상태 의병장의 휘(諱)는 상호(尙鎬), 자(字)는 경륙(京六), 호(號)는 백우(白愚)이다. 본관은 삼척으로 삼척군(三陟郡) 추(錘)의 28세손으로 1862년 충북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에서 태어나 친척인 김명호(金明鎬)가 살고 있는 영월군 김삿갓면 옥동리로 이주하였다.
1907년 운강(雲岡) 이강년(李康秊) 의병장은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주천 강변에 돌단을 쌓고 의병들의 군례(軍禮)를 받으며 '주천정미의병(酒泉丁未義兵)'의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이 되었다. 이때 주천으로 모인 의병진은 40여 부대나 되었다. 주천정미의병에서 중군장(中軍將)을 맡은 김상태(金尙台) 의병장은 신출귀몰(神出鬼沒)한 작전으로 일본군 제47연대장 '이쿠
다 모쿠신(生田目新)' 대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주전정미의병'은 수주면전투·주천 다래산전투·남면 창동리전투·영월 덕포리 독산(獨山, 여우고개)전투. 1907년 9월 3일 김삿갓면 밀동(密洞)전투와 와석리 도일바위전투 등을 승리로 이끌고 11월 16일 와석리 든돌에서 의병진을 재편성하였다.
특히 와석리 찬물나드리의 도일바위(屠日巖)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1907년 7월 26일 경주김씨 집성촌인 와석리 주실이 동네를 불태우고 서당 훈장인 김성희(金性熙)의 귀와 팔을 자르고 김도희(金道熙)·김일희(金日熙)·김정운(金正雲) 등을 살육하였다.
이후, 이강년 의병장이 1908년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발목에 관통상을 입고 제천 수비대장 ‘키지마(貴島)’ 소위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되었다. 이강년(李康秊)이 순국하자 김상태 의병장은 ‘호좌창의대장(湖左倡義大將)’이 되어 격고문(檄告文)을 발표하고 영월·단양·영춘·순흥 등지에서 활발한 의병투쟁을 하였다. 1910년 3월 김상태는 양백지간(兩百之間)에서 의병항쟁을 전개했는데 김상태 의진은 전투 능력이 뛰어나 순흥과 단양 등지에 있는 일제의 수비시설을 파괴하고, 기습 전투로 일본군과 교전한 것이 무려 40여 회에 달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상태 의병장은 밀정 우종응(禹鐘應)의 신고로
특히 와석리 찬물나드리의 도일바위(屠日巖)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1907년 7월 26일 경주김씨 집성촌인 와석리 주실이 동네를 불태우고 서당 훈장인 김성희(金性熙)의 귀와 팔을 자르고 김도희(金道熙)·김일희(金日熙)·김정운(金正雲) 등을 살육하였다.
이후, 이강년 의병장이 1908년 청풍 까치성 전투에서 발목에 관통상을 입고 제천 수비대장 ‘키지마(貴島)’ 소위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되었다. 이강년(李康秊)이 순국하자 김상태 의병장은 ‘호좌창의대장(湖左倡義大將)’이 되어 격고문(檄告文)을 발표하고 영월·단양·영춘·순흥 등지에서 활발한 의병투쟁을 하였다. 1910년 3월 김상태는 양백지간(兩百之間)에서 의병항쟁을 전개했는데 김상태 의진은 전투 능력이 뛰어나 순흥과 단양 등지에 있는 일제의 수비시설을 파괴하고, 기습 전투로 일본군과 교전한 것이 무려 40여 회에 달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상태 의병장은 밀정 우종응(禹鐘應)의 신고로
1911년 6월 14일 경북 순흥군 연화동 상단곡에서 영주 수비대장 무나카타 켄(崇片謙) 대위에게 체포되어 3년 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때 그의 언행은 단호했으며 또한 죽음을 예사로이 여겨 음식을 거절한 채 단식중인 1911년 9월 21일 수인번호 1002번을 달고 수갑을 찬채 대구 감옥에서 사형되었다.
백우 김상태 의병장의 시신은 그의 유언에 따라 평생 형제지의(兄弟之誼)를 맺었던 제천시 두학동에 있는 이강년 의병장의 무덤 곁에 묻혔으나, 현재는 새로 조성된 제천시 의병골 순국선열 묘역에 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항일의병의 발상지인 영월 의병의 역사와 발자취는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도 우리 고장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이에 구국(救國)의 일념으로 평생을 살다 간 김상태 의병장의 충절과 항일의병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오늘 영월군민의 뜻을 모아 이 빗돌을 세운다.
2021년 9월 21일 영월문화원
백우 김상태 의병장의 시신은 그의 유언에 따라 평생 형제지의(兄弟之誼)를 맺었던 제천시 두학동에 있는 이강년 의병장의 무덤 곁에 묻혔으나, 현재는 새로 조성된 제천시 의병골 순국선열 묘역에 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항일의병의 발상지인 영월 의병의 역사와 발자취는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아직도 우리 고장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이에 구국(救國)의 일념으로 평생을 살다 간 김상태 의병장의 충절과 항일의병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오늘 영월군민의 뜻을 모아 이 빗돌을 세운다.
2021년 9월 21일 영월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