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3구
- 탐방로그
-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3구 595-136 '수당 이남규 선생 순절의 땅' 기념비를 찾아왔다. 1986년에 이남규 부자 순절 당시 생존자였던 가수복(賈壽福)의 증언으로 위치를 확인하여 현장에 '수당 이남규 선생 순절의 땅'이라는 기념탑이 건립되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이곳은 항일 斥倭(척왜)의 표상 수당선생
맏아들 충구 하인 김응길이 순절한
忠孝誠(충효성)의 현장이다.
맏아들 충구 하인 김응길이 순절한
忠孝誠(충효성)의 현장이다.
충남 아산시 송악면 외암리 3구 595-136 '수당 이남규선생 순절의 땅' 기념비
수당 이남규선생 순절의 땅. 수당 이남규선생은 1855년 11월 3일 서울 미동에서 태어났으며, 향리는 예산이다. 1875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승문권권지부정자를 거쳐 형조참의, 영흥부사, 안동관찰사등을 역임하다가 을미사변후 향리인 예산으로 내려와 상소를 통한 반일운동을 전개했다. 그의 반일 활동은 상소운동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1893년 입도왜병축소를 올렸다. 1894년 일본공사 대도규개가 군사를 이끌고 입성하자, 청절왜소를 올렸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에 이어 폐후조칙이 발표되자, 당시 영흥부사를 지내고 있던 이남규는 청복황후위호토적복수소를 올렸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청군신상배성일전소를 올린 뒤 깨끗히 처신할 것을 결심하고 두문 불출하였다. 1906년 민종식의 홍주의진 선봉장에 임명되었으나 홍주성에 입성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홍주의진이 크게 패하자 민종식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선생의 집을 중심으로 홍주탈환작전 본부가 형성되어 1906년 10월 5일 거사할 준비가 갖추어졌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1907년 8월 19일 일경에 체포 압송도중 온양 외암촌 냇가에 이르러 아들 충구, 교노 김을길과 함께 저들의 칼에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修堂李南奎先生(수당 이남규선생) 殉節(순절)의땅
수당선생 순절기
수당 이남규 선생은 고려 말 목은 이색 선생의 후예로 1855년 서울 미동(尾洞)에서 태어나 문과에 급제 벼슬은 궁내부 특진관에 올랐다. 일제의 침략 마수가 이 땅을 죄어들자 일찍이 척왜항일의 굳은 신념을 불태워온 수당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영흥부 사직을 박차고 왜적을 물리칠 것과 적신의 머리를 베라는 추상같은 상소와 실제의 행동은 당대의 추앙을 받았다.
1906년 의병들의 홍주성 봉기를 뒤에서 후원하고 의병장 민종식을 숨겨준 일로 왜군에 의해 공주 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07년 9월 26일 선생을 두고는 그들의 침략이 뜻과 같지 않을 것임을 안 백여 명의 왜군은 이곳에서 20여 리 떨어진 대술면 상항리 선생의 사저 평원정(平遠亭)을 에워싸고 묶으려 했다. 선생은 이에 "선비는 죽을 수 있으되 욕된 일은 당하지 않으리라."하고 외치며 가마를 타고 나섰다. 해가 지기를 바라 뒤따르던 왜족들이 이곳 평촌 냇가에 이르러 선생을 마지막으로 회유하자 "죽을 수는 있어도 너희에게 굽히지 않겠다."는 선생의 호령이 떨어지자 저녁놀에 반짝이는 칼을 높이 쳐들었다. 뒤따르던 맏아들 충구가 몸으로 선생을 감싸자 내리친 칼에 쓰러지니 가마를 맨 하인 김응길 가수복이 또 선생을 에워싸는 순간 칼날이 어지러이 비켜 아들도 하인도 선생도 모두 쓰러지니 향년 쉰 셋이었다.
오호라! 이 어찌 천추에 빛날 충절이요. 효도이며 충복이 아닐손가. 사람은 갔으되
그 불멸의 정신은 여기 해지는 석양 지나는 길손의 피를 끓이고 옷깃을 여미게 한다.
1986년 12월 15일 충청남도 지사 안응모 지음 한국예총충청남도지회장 조종국 씀
수당 이남규 선생은 고려 말 목은 이색 선생의 후예로 1855년 서울 미동(尾洞)에서 태어나 문과에 급제 벼슬은 궁내부 특진관에 올랐다. 일제의 침략 마수가 이 땅을 죄어들자 일찍이 척왜항일의 굳은 신념을 불태워온 수당은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영흥부 사직을 박차고 왜적을 물리칠 것과 적신의 머리를 베라는 추상같은 상소와 실제의 행동은 당대의 추앙을 받았다.
1906년 의병들의 홍주성 봉기를 뒤에서 후원하고 의병장 민종식을 숨겨준 일로 왜군에 의해 공주 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1907년 9월 26일 선생을 두고는 그들의 침략이 뜻과 같지 않을 것임을 안 백여 명의 왜군은 이곳에서 20여 리 떨어진 대술면 상항리 선생의 사저 평원정(平遠亭)을 에워싸고 묶으려 했다. 선생은 이에 "선비는 죽을 수 있으되 욕된 일은 당하지 않으리라."하고 외치며 가마를 타고 나섰다. 해가 지기를 바라 뒤따르던 왜족들이 이곳 평촌 냇가에 이르러 선생을 마지막으로 회유하자 "죽을 수는 있어도 너희에게 굽히지 않겠다."는 선생의 호령이 떨어지자 저녁놀에 반짝이는 칼을 높이 쳐들었다. 뒤따르던 맏아들 충구가 몸으로 선생을 감싸자 내리친 칼에 쓰러지니 가마를 맨 하인 김응길 가수복이 또 선생을 에워싸는 순간 칼날이 어지러이 비켜 아들도 하인도 선생도 모두 쓰러지니 향년 쉰 셋이었다.
오호라! 이 어찌 천추에 빛날 충절이요. 효도이며 충복이 아닐손가. 사람은 갔으되
그 불멸의 정신은 여기 해지는 석양 지나는 길손의 피를 끓이고 옷깃을 여미게 한다.
1986년 12월 15일 충청남도 지사 안응모 지음 한국예총충청남도지회장 조종국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