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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역촌리 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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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아산시 송악면 역촌리 75-1 외암마을 애국지사 곽한일 의병장 송덕비를 찾아왔다. 이 비석은 증손이신 곽명신 님이 역촌리 본인의 마을에 건립하였지만 장소가 협소하여 이 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 비는 곽명신 님을 비롯하여 곽한일 의병장 송덕비 건립 추진위원회가 2005년 건립하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곽한일 의병장 송덕비(愛國志士 郭漢一 義兵將 頌德碑)
많은 시간이 흐른후, 이 비석은 증손사 이신 곽명신님이 역촌리 본인의 마을에 건립하였지만 장소가 협소하여 이곳으로 옮긴것이었다.
애국지사 곽한일 의병장의 생애
장암(壯庵) 곽한일 의병장은 1869년(고종 6년) 12월 15일 경기도 여주에서 청주곽씨로 31세손 곽승현의 장남으로 출생하셨다. 님의 조부께서는 조선왕조 철종과 고종대의 정2품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내시고 절충장군(折衝將軍)과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내신 곽치섭 부호군 이시다. 곽한일 의병장은 화서(華西) 이항로의 고제(高弟) 면암(勉庵) 최익현 문하의 화서학파에 속한 유학자로 당시 외세배척의 물결을 타고 척사파(斥邪派)의 정신적 지주가 된 유학 이론과 윤리와 미풍양속 등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을 집대성한 「대동정로(大東正路)」 6권 3책을 전국 유림들의 참여와 후원으로 1903년에 찬집 발간하셨다. 현재 이 책은 서울대 규장각에 보존되어 있어 많은 역사가들의 연구도서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나라를 향한 일본의 야욕이 점점 노골화되자 님의 부친께서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산을 정리하여 장남의 의병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일가와 더불어 아산 송악으로 이주하여 적극 후원하기에 이른다. 일본에 의해 천인공노할 명성황후 사해사건 발발(勃發) 후 이듬해 1896년 경기도 안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신돌석 의병부대아 합류하여 막강한 전세를 올렸으나 일본 헌병대와 관군의 신식무기에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시다. 그러나 나라 위한 봉기의 집념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충청남도 아산 예산 청양 등지를 잠행하시며 비밀리에 애국동지를 규합하여 의병부대를 재결성하는데 성공 1906년 4월 4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해미읍성을 점검하려던 차에 민종식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홍주성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부대의 진로를 바꿔 홍주성으로 진격 민종식 의병부대에 합류해 돌격장과 소모장으로 활약하셨다.
장암(壯庵) 곽한일 의병장은 1869년(고종 6년) 12월 15일 경기도 여주에서 청주곽씨로 31세손 곽승현의 장남으로 출생하셨다. 님의 조부께서는 조선왕조 철종과 고종대의 정2품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내시고 절충장군(折衝將軍)과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내신 곽치섭 부호군 이시다. 곽한일 의병장은 화서(華西) 이항로의 고제(高弟) 면암(勉庵) 최익현 문하의 화서학파에 속한 유학자로 당시 외세배척의 물결을 타고 척사파(斥邪派)의 정신적 지주가 된 유학 이론과 윤리와 미풍양속 등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을 집대성한 「대동정로(大東正路)」 6권 3책을 전국 유림들의 참여와 후원으로 1903년에 찬집 발간하셨다. 현재 이 책은 서울대 규장각에 보존되어 있어 많은 역사가들의 연구도서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나라를 향한 일본의 야욕이 점점 노골화되자 님의 부친께서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산을 정리하여 장남의 의병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일가와 더불어 아산 송악으로 이주하여 적극 후원하기에 이른다. 일본에 의해 천인공노할 명성황후 사해사건 발발(勃發) 후 이듬해 1896년 경기도 안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신돌석 의병부대아 합류하여 막강한 전세를 올렸으나 일본 헌병대와 관군의 신식무기에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시다. 그러나 나라 위한 봉기의 집념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충청남도 아산 예산 청양 등지를 잠행하시며 비밀리에 애국동지를 규합하여 의병부대를 재결성하는데 성공 1906년 4월 400여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해미읍성을 점검하려던 차에 민종식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홍주성에서 일본군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부대의 진로를 바꿔 홍주성으로 진격 민종식 의병부대에 합류해 돌격장과 소모장으로 활약하셨다.
홍주성 의병전쟁은 우리나라 의병전쟁사의 서막을 장식한 매우 극렬한 전투로 기록되어진다. 홍주성 의병들은 끝까지 용전분투하였으나 낙후된 병기로는 적국의 신식무기와 화력에 불가항력일 수밖에 없었다. 열흘간의 밀고 밀리는 접전 끝에 5월 3일 적의 총공세에 맞선 의병진의 사활을 건 백병전은 의병들의 거룩한 투혼으로 점철된 혈전이었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적의 대공세로 인해 결국 홍주성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함락되었으며 곽한일 의병장은 극적으로 탈주에 성공 전라도 순창에 있던 최익현 의병장이 이끄는 의병부대에 합류하고자 하였으나 역시 이미 패퇴한 뒤였기에 독자적으로 거사 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같은 해 9월 김덕진 김운탁 박윤식 이남규 정재호 등과 협의해 거듭 의병을 일으켜 참모로 임명되시다. 이어 수백 명의 군사를 예산읍에 배치하고 다음 달 5일 총공격을 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사전에 거사계획이 발각되는 바람에 의병장 민종식과 함께 체포되시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수감 옥고를 치르시다가 1907년 7월 종신유배형으로 감형 전남 신안군의 작은 섬 지도에서 유배생활을 하시던 중 고종황제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나셨다. 그러나 점점 비찬에 빠져가는 국운에 통한의 눈물을 삼키시며 분기(奮起)할 날만을 기다리시는데 고종황제께서 극비리에 검과 의대조(衣帶詔:허리띠에 감춰 내려진 밀지)를 내리시고 전라도의 임병찬 의병장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게 되시어 1913년 2월 부터 총무총장으로 활약하시게 된다. 이후 전국적 규모의 국권회복운동의 방향을 모색하시며 전국을 잠행 의군부원 모집과 군자금모금을 주도하시며 전국 조직을 마치고 거사의 그 날을 기다리다가 전모가 발각되어 대봉기의 꿈이 좌초되시니 이른바 독립의군부 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셨다.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셨다. 출옥 후에도 존양토복(尊攘討復:왕실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쳐 나라를 되찾음)의 간절한 꿈을 접지 못하시매 계속하여 독립투쟁을 암암리에 전개하시다가 1914년 또 다시 발각되어 외딴섬 유배생활로 인고의 세월을 보내셨다. 1916년에 종신집행유예로 아산 송악으로 돌아오시니 조국독립을 강렬한 집념을 불태우시다가 큰 뜻을 못 이루시고 1936년 3월 21일 타계하시기까지 일본경찰의 표적 같은 감시를 받으셨다. 그러나 생전에 이루셨던 독립의군부의 전국적 조직과 투쟁의식은 기미년 3.1만세운동으로 온 겨레의 대대적인 봉기를 가능케 하였으니 님의 드높은 뜻이 결코 무산되지 않았음이라..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님의 독립운동에 바친 고귀한 뜻을 받들어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고 전투시에 사용하시던 장검은 서울 서대문독립공원과 천안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있다. 애국지사 곽한일 의병장은 이처럼 나라사랑과 겨레사랑의 선구자이셨다. 고매하신 학문으로 민중을 교화하였으며 일본의 국권침탈 앞에 장검을 들어 바람처럼 잠행하시어 동지를 모으시고 투쟁하셨다. 수차례 체포되시어 불꽃 같은 강인함으로 옥고를 이겨내시니 아산인의 자랑이자 민족정기의 모범이시다. 후대의 우리들은 님의 유지를 받들어 경외(敬畏)하며 님의 거룩한 족적(足跡)을 기리고 칭송하여 이 터전 뒤에 길이 새겨 남기리라.
서기 2005년 10월 글 : 곽노홍 극작가 한성디지털대학교수
수비 : 곽한일 의병장 송덕비 건립 추진위원회
서기 2005년 10월 글 : 곽노홍 극작가 한성디지털대학교수
수비 : 곽한일 의병장 송덕비 건립 추진위원회
衣帶詔(의대조) : 허리띠에 감춰 내려진 고종황제의 밀지
痛哉島夷背信合倂
宗社爲墟國民爲隸朕
本爲生靈身受恥辱反害生靈國家
從亡靜言鬼愆百身難贖天古之萬世之恨何以湔洗收恃唯爾爾等其體戮力
光復凡在爵賞誓指山河玆降血詔組織獨立義軍府爾等須糾合多士奬率百姓
克期進取膚奏厥功嗚乎知當日啓下命
獨立義軍府
痛哉島夷背信合倂
宗社爲墟國民爲隸朕
本爲生靈身受恥辱反害生靈國家
從亡靜言鬼愆百身難贖天古之萬世之恨何以湔洗收恃唯爾爾等其體戮力
光復凡在爵賞誓指山河玆降血詔組織獨立義軍府爾等須糾合多士奬率百姓
克期進取膚奏厥功嗚乎知當日啓下命
獨立義軍府
충남 아산시 송악면 역촌리 75-1 외암마을 애국지사 곽한일 의병장 송덕비를 찾아왔다.
곽한일(1869년~1936년, 조선 말기의 의병장)
의병장 곽한일은 이 고장 출신으로 1895년 일본의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불에 태우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나라의 모든 국민이 깊은 슬픔에 잠겼다. 이에 학문에 정진하던 유림들이 붓 대신 칼을 들어 일본의 무력에 대항하는 의병전쟁을 일으켰다. 곽한일은 화서학파의 문인으로 면암 최익현의 제자였다. 1906년 봄에 홍주의병에 가담하여 홍주성 공격에 크게 활약하였다. 홍주성이 일본군에 합락되자, 피신하며 재거의를 도모하던 중 일진회의 밀고로 붙잡혀 1907년 7월 종신유배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감옥에 투옥된 뒤 다시 전라남도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1912년에 풀려났다. 1913년 고종의 밀명으로 독립의군부 총무총장에 임명되어 전국적 규모의 의병전쟁을 계획하며 동지의 규합과 군자금 모금에 힘쓰다가 1914년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 뒤 특사로 풀려났으나 가택 연금되어 일본 경찰들의 매서운 감시를 받다가 1936년 별세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의병전쟁 당시에 사용하던 도검이 서대문독립공원 역사관과 천안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의병장 곽한일은 이 고장 출신으로 1895년 일본의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불에 태우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나라의 모든 국민이 깊은 슬픔에 잠겼다. 이에 학문에 정진하던 유림들이 붓 대신 칼을 들어 일본의 무력에 대항하는 의병전쟁을 일으켰다. 곽한일은 화서학파의 문인으로 면암 최익현의 제자였다. 1906년 봄에 홍주의병에 가담하여 홍주성 공격에 크게 활약하였다. 홍주성이 일본군에 합락되자, 피신하며 재거의를 도모하던 중 일진회의 밀고로 붙잡혀 1907년 7월 종신유배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감옥에 투옥된 뒤 다시 전라남도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1912년에 풀려났다. 1913년 고종의 밀명으로 독립의군부 총무총장에 임명되어 전국적 규모의 의병전쟁을 계획하며 동지의 규합과 군자금 모금에 힘쓰다가 1914년에 붙잡혀 옥고를 치른 뒤 특사로 풀려났으나 가택 연금되어 일본 경찰들의 매서운 감시를 받다가 1936년 별세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의병전쟁 당시에 사용하던 도검이 서대문독립공원 역사관과 천안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