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아산시 선장면 군덕리 375-12
- 탐방로그
- 아산시 선장면 독립운동가 마을길 표지판이 충남 아산시 선장면 군덕리 375-12 4.4만세운동기념공원 내 새롭게 추가되었다. 아산시 선장면 독립운동가 마을길 표지판은 아산 선장면 지역의 독립운동가 묘소와 집터, 만세 시위 진행지, 기념시설 등을 소개하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군덕3리에 묘소가 있다고 되어있는 정태영, 정수길 부자 중에서 아드님이신 정수길 선생의 묘소만 표시되어 있다.
아산시 선장면 독립운동가 마을길
아산시 선장면 독립운동가 마을길
□ 아산 3.1운동의 전개 - 아산지역의 3.1운동은 3월 1일 독립선언서 발표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서울과 인근 지역 독립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아산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것이 효시로, 3월 12일, 14일, 15일에 걸쳐 학생들을 중심으로 지역민들이 참여하여, 온양 읍내와 영인면에서 주로 전개되었다. 일제의 헌병과 수비대의 진압 작전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주춤하게 되었으나, 15일 후인 3월 31일부터 횃불독립만세운동 형태로 재점화되어, 3월 31일 3개 면의 50여 개소, 4월 1일 6개 면, 4월 2일과 3일 아산군내 12개 면 각마을에서 산 위에 올라 불을 놓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한 4월 2일 신창, 4일 선장에서는 일제의 헌병주재소, 면사무소, 공립보통학교 등 식민기관을 파괴하는 폭력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 아산 3.1운동의 전개 - 아산지역의 3.1운동은 3월 1일 독립선언서 발표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서울과 인근 지역 독립만세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아산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1일 온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교정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것이 효시로, 3월 12일, 14일, 15일에 걸쳐 학생들을 중심으로 지역민들이 참여하여, 온양 읍내와 영인면에서 주로 전개되었다. 일제의 헌병과 수비대의 진압 작전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주춤하게 되었으나, 15일 후인 3월 31일부터 횃불독립만세운동 형태로 재점화되어, 3월 31일 3개 면의 50여 개소, 4월 1일 6개 면, 4월 2일과 3일 아산군내 12개 면 각마을에서 산 위에 올라 불을 놓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한 4월 2일 신창, 4일 선장에서는 일제의 헌병주재소, 면사무소, 공립보통학교 등 식민기관을 파괴하는 폭력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 아산 3.1운동의 절정 - 선장면 4.4 독립만세운동
아산 3.1운동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1919년 4월 4일 선장면의 독립만세운동이었다. 4월 4일은 장날이었으며 선장면의 3.1운동은 그 격렬함과 규모에 있어서 아산지역 3.1운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4월 4일 선장면에서는 정수길.서몽조.임천근.오상근 등은 군덕리 시장에서 면새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 4명은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듣고, 지역민들과 더불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결의하였다. 4인이 군중에게 조선독립시위운동에 가담하자고 권유하자, 김천봉을 비롯해 약 200명이 호응하여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오후 3시경에는 정수길,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 4인은 곤봉을 휘드르며 면민들을 이끌어 선장 헌병 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주재소에 도착한 군중들은 건물과 창에 돌을 던지는 등 파괴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김천봉은 군중들과 함께 솔선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헌병 주재소에서도 건물과 창을 파손시키는 활동 등을 주도하였다. 만세 군중들의 활발한 독립만세운동에 헌병이 발포하면서 제지하여, 만세 군중들은 해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날의 시위는 가장 폭력적으로 진압되었으며, 헌병의 발포로 시위 참가자 중 한명인 최병수(崔炳秀 43세, 1876~1919)가 목숨을 잃었다.
아산 3.1운동의 대미를 장식한 것은 1919년 4월 4일 선장면의 독립만세운동이었다. 4월 4일은 장날이었으며 선장면의 3.1운동은 그 격렬함과 규모에 있어서 아산지역 3.1운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4월 4일 선장면에서는 정수길.서몽조.임천근.오상근 등은 군덕리 시장에서 면새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 4명은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듣고, 지역민들과 더불어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결의하였다. 4인이 군중에게 조선독립시위운동에 가담하자고 권유하자, 김천봉을 비롯해 약 200명이 호응하여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오후 3시경에는 정수길,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 4인은 곤봉을 휘드르며 면민들을 이끌어 선장 헌병 주재소로 이동하였다. 주재소에 도착한 군중들은 건물과 창에 돌을 던지는 등 파괴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김천봉은 군중들과 함께 솔선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헌병 주재소에서도 건물과 창을 파손시키는 활동 등을 주도하였다. 만세 군중들의 활발한 독립만세운동에 헌병이 발포하면서 제지하여, 만세 군중들은 해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날의 시위는 가장 폭력적으로 진압되었으며, 헌병의 발포로 시위 참가자 중 한명인 최병수(崔炳秀 43세, 1876~1919)가 목숨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