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아산시 선장면 군덕리 292-6
- 탐방로그
- 삼거리도로변에 애국지사 정수길(정규희)의 묘소 안내석이 존재하며, 애국지사 정수길의 묘에서 애국지사 정수길(정규희)의 집터까지는 1.8km 떨어져있고, 도보로는 27분, 차량으로는 4분 정도 소요된다. 정수길(정규희) 선생의 묘소는 정규희 선생 부친의 묘소와 함께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아산시 선장면 군덕리 317-5 삼거리도로변 애국지사 정수길(정규희)의 묘소 안내석
묘비는 보이지만 올라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다.
羅州丁公 建燮 之墓(나주정공 건섭 지묘) 정규희 선생의 부친 묘소이다.
정태영 접주 정수길 지사 묘소 / 정태영 접주(丁泰榮, 建燮, 1859~1922)
동학농민혁명 접주 정태영(건섭)의 묘이다. 정태영 접주는 1859년 우강면 신흥리에서 출생하고, 선장으로 이주하여 1880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1892년 공주집회, 1893년 보은집회에 참여하고, 1894년 선장에서 기포하여, 면천 승전목전투, 신례원 관작리전투, 홍주성전투에 참여하였다. 이후, 동학도들을 규합하여 선장 4.4만세운동을 돕고, 1906년 천도교 예산교구 설립에 공헌하시다가, 1922년 8월 22일 환원하여 이곳에 안장되었다.
동학농민혁명 접주 정태영(건섭)의 묘이다. 정태영 접주는 1859년 우강면 신흥리에서 출생하고, 선장으로 이주하여 1880년 동학에 입도하였다. 1892년 공주집회, 1893년 보은집회에 참여하고, 1894년 선장에서 기포하여, 면천 승전목전투, 신례원 관작리전투, 홍주성전투에 참여하였다. 이후, 동학도들을 규합하여 선장 4.4만세운동을 돕고, 1906년 천도교 예산교구 설립에 공헌하시다가, 1922년 8월 22일 환원하여 이곳에 안장되었다.
정수길 지사(丁壽吉, 奎熙, 1895~1979)
1919년 4월 4일 선장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정수길(규희) 애국지사의 묘이다. 1895년 대술면 이타리에서 출생하여, 1906년 동학에 입도하였고, 1919년 4월 4일 선장 장날을 택해 동지들과 규합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그 결과,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2년 6월의 옥고를 치르다가, 출옥 후, 6.10만세운동, 무인멸왜기도운동, 신간회 운동에 참여하고, 천도교 예산교구장을 역임하다 1979년 5월 23일 환원하여 이곳 선영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919년 4월 4일 선장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정수길(규희) 애국지사의 묘이다. 1895년 대술면 이타리에서 출생하여, 1906년 동학에 입도하였고, 1919년 4월 4일 선장 장날을 택해 동지들과 규합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그 결과,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2년 6월의 옥고를 치르다가, 출옥 후, 6.10만세운동, 무인멸왜기도운동, 신간회 운동에 참여하고, 천도교 예산교구장을 역임하다 1979년 5월 23일 환원하여 이곳 선영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愛國志士 奎菴 丁公 奎熙 之墓(애국지사 규암 정공 규희 지묘)
공의 휘는 규희이며 호는 규암이요, 수길은 아명이다. 본관은 나주로서 시조는 려말 검교대장군 정윤종의 20세손이다. 공은 서기 1895년 1월 3일 예산군 대술면 이티리에서 탄생하여 식곤한 가정에서 자라나 안성이씨와 결혼하여 2남 6녀를 두다. 공은 천품이 청렴강직하고 총명한 지혜로 1902년 향리의 서숙에서 동학을 수학하다가 아산군 선장면 군덕리로 이거하였으며 1907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인내천 종지와 사인여천의 교리를 탐구하고 1908년 신창사립신민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닦아 학문과 덕행이 남달리 뛰어나다. 공은 충의로운 기품으로 애국정신이 투철하여 1910년 한일합방이 된 후에는 나라잃은 설움을 한탄하고 항일구국투쟁에 쇄신할 겄을 결심 동지들을 규합하고 기회를 였보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
국 각지에서 독립시위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호응하여 김천봉 서몽조 임천근 오상근 등과 모의하고 동년 4월 4일 선장면 군덕리 선장시일을 택하여 2백여 명의 군중으로 하여금 독립 시위운동에 가담토록 주도하여 대한민국만세를 절규하고 주동한 동지들과 같이 곤봉을 휘두루며 군중을 지휘 선장면 헌병주재소에 살도하여 투석전을 전개하고 구내에 침입 유리 창 등을 파괴하는 등 일제의 치안을 방해하다. 공은 주모한 동지들과 같이 일병에 체포되어 극악무도한 고문과 치욕 속에도 뜻을 굽히지 않으시다.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으며 동년 5월 1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 항소하였으나 동년 9월 4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쓰라린 옥고에 시달려 신병으로 고생하다 형기 만료로 출옥하다. 공은 감시를 당하면서도 1938년 천도교 멸왜기도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왜경에 피검 온양경찰서에 구금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신병을 얻고 13일만에 출감되어 40여일간 가료를 받었으며 그 후 왜경의 간악한 감시로 인하여 구국의 웅지를 펴보지도 못하고 8.15 해방을 맞이하다. 공은 숭고한 애국정신을 발휘하여 조국의 자주독립운동에 헌신하였음에도 이를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정부의 포상을 사양하였으며 천도교의 기본사상으로 조국의 평화통일만을 염원하다. 1979년 5월 23일 향년 85세를 일기로 한 많은 형극의 생애를 마치고 이곳 아산군 선장면 군덕리 산 38번지에 배위 안성이씨와 합장하여 모시다. 공의 항일투쟁은 조국광복의 저력이 되였으며 공이 남기신 거룩한 애국의 얼은 민족정기의 정화요. 인류정의의 구현이라 할 겄이다. 이에 정부에서는 1980년 8월 14일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여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이를 높이 추앙하고 후세에 영원히 빛내기 위하여 여기에 이 비석을 세우다.
서기 1983년 5월 13일 아산군수 정필모 수립
서기 1983년 5월 13일 아산군수 정필모 수립
지사의 묘소 아래쪽은 두 아드님 완직, 세직 두 분의 묘소였다. 같은 자리에 3대가 같이 계신 것이다.
묘소로 올라가는 길은 묘비가 보이는 언덕 오른쪽 전봇대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었다.
최병수 열사 순국지 1.1㎞ / 4.4 만세운동 기념공원 1.0㎞ / 정수길 지사 집터 0.5㎞
정수길 지사 묘소 1.2㎞
정수길 지사 묘소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