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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남도 아산시 방축동 산77-1
- 탐방로그
- 아산시 방축동 산77-1에 위치한 아산항일민족운동자료 전시관은 신정호수공원 안에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아산시 방축동 산77-1 신정호수공원 구 문화의 집 아산항일민족운동자료 전시관을 찾았다.
아산항일민족운동 자료전시관
서몽조, 승일상, 고원상, 김양순, 김금복
정수길(丁壽吉, 1895~1979)
선장면 군덕리 사람으로 동학 지도자 정태영(丁泰榮)의 아들이며, 뒤에 천도교 지도자가 되었다. 호는 규암(奎庵), 본명은 규희(奎熙)이고 수길은 아명이다. 서몽조.임천근.오상근과 모의하고 4월 4일 선장 장날을 택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200여 명의 군중 앞에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로 인해 일제 경찰에 체포된 뒤 공주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2년 6월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천도교 지도자로서 6.10만세운동과 멸왜기도운동에도 참여하여 다시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해방 후에도 천도교 정비와 평화통일운동에 헌신하였다. 정부는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광복절을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선장면 군덕리 사람으로 동학 지도자 정태영(丁泰榮)의 아들이며, 뒤에 천도교 지도자가 되었다. 호는 규암(奎庵), 본명은 규희(奎熙)이고 수길은 아명이다. 서몽조.임천근.오상근과 모의하고 4월 4일 선장 장날을 택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200여 명의 군중 앞에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로 인해 일제 경찰에 체포된 뒤 공주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징역 2년 6월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천도교 지도자로서 6.10만세운동과 멸왜기도운동에도 참여하여 다시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해방 후에도 천도교 정비와 평화통일운동에 헌신하였다. 정부는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광복절을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복희(金福熙, 1901~1986)
염치읍 백암2리 구무골 사람이다. 백암교회 안의 영신학교를 거쳐 선교사 샤프(한국이름 사애리시)의 추천으로 이화보통학교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현 이화여고)를 졸업했다. 졸업을 앞두고 서울의 3.1만세운동을 목격했고, 휴교령으로 고향에 와서 백암교회 부설 영신학교 교사 한연순과 3월 31일 밤의 백암리 방화산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방화산 봉화시위 당시 여성은 김복희와 한연순 둘뿐이었는데 헌병들이 총을 쏘며 올라올 때 피신하다가 산에서 굴러 다쳤다. 이들은 치료 중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 재판에서 징역 2개월과 3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김복희는 이후 유치원 교육, 선교 활동, 농촌 계몽활동, 여성운동 등에 헌신하였다.
염치읍 백암2리 구무골 사람이다. 백암교회 안의 영신학교를 거쳐 선교사 샤프(한국이름 사애리시)의 추천으로 이화보통학교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현 이화여고)를 졸업했다. 졸업을 앞두고 서울의 3.1만세운동을 목격했고, 휴교령으로 고향에 와서 백암교회 부설 영신학교 교사 한연순과 3월 31일 밤의 백암리 방화산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방화산 봉화시위 당시 여성은 김복희와 한연순 둘뿐이었는데 헌병들이 총을 쏘며 올라올 때 피신하다가 산에서 굴러 다쳤다. 이들은 치료 중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 재판에서 징역 2개월과 3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김복희는 이후 유치원 교육, 선교 활동, 농촌 계몽활동, 여성운동 등에 헌신하였다.
임천근(林千根, 1890~1965)
선장면 군덕리 사람으로 1919년에는 장곳리에 살았다. 본명은 임화철(林化喆), 호는 도곡이다. 1919년 4월 4일 선장면 장터에서 정수길.서몽조.오상근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80년 8월 14일 대통령 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선장면 군덕리 사람으로 1919년에는 장곳리에 살았다. 본명은 임화철(林化喆), 호는 도곡이다. 1919년 4월 4일 선장면 장터에서 정수길.서몽조.오상근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고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80년 8월 14일 대통령 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최병수(崔炳秀, 1876~1919)
선장면 대정리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의 선장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군중에 앞장서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가 일본 헌병의 야만적인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선장면 대정리 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의 선장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군중에 앞장서서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가 일본 헌병의 야만적인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강달성(姜達成, 1889~?)
신창면 읍내리 사람이며 일명 강운교(姜雲敎)다. 송악면 강당리에서 출생하였고 직업은 농민이었다. 1919년 4월 2일 밤의 신창면 읍내리 만세운동에서 앞장섰다. 박진화와 함께 헌병주재소 등에 가장 먼저 돌을 던지며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피신했다가 체포된 뒤 공주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1919년 10월 4일 고등법원 상고 법정에서 "나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와 인도에 근거하여 의사 발동한 것으로 범죄가 아니다."라고 독립만세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기각되어 보안법 위반 및 건조물 손괴, 소요죄로 서대문 감옥에서 징역 1년 6월의 옥고를 치렀다.
강달성선생은 공훈록에서 찾을 수가 없다.
신창면 읍내리 사람이며 일명 강운교(姜雲敎)다. 송악면 강당리에서 출생하였고 직업은 농민이었다. 1919년 4월 2일 밤의 신창면 읍내리 만세운동에서 앞장섰다. 박진화와 함께 헌병주재소 등에 가장 먼저 돌을 던지며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피신했다가 체포된 뒤 공주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1919년 10월 4일 고등법원 상고 법정에서 "나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와 인도에 근거하여 의사 발동한 것으로 범죄가 아니다."라고 독립만세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기각되어 보안법 위반 및 건조물 손괴, 소요죄로 서대문 감옥에서 징역 1년 6월의 옥고를 치렀다.
강달성선생은 공훈록에서 찾을 수가 없다.
아산의 독립운동
□ 비밀결사 활동 - 의병장 곽한일은 고종의 밀명으로 조직된 독립의군부에 참여해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성달영.성문영 형제와 강석주는 대한광복회에 가담해 활동하고 친일파 도고면장 박용하 처단을 지원하여 고초를 겪었다.
□ 3.1운동(3.1혁명) - 1919년 3.1운동 당시 아산에서는 온양초등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시작하였고, 아산의 12개 면 모든 지역에서 다양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장터에서는 만세시위 외에도 각 지역의 마을 근처 산꼭대기 50여 곳에서 불을 피우고 만세를 외치기도 하였고, 주재소나 면사무소 습격, 광혈 파괴 등 폭력적으로 전개하기도 하였다.
□ 무장독립전쟁 - 3.1운동 이후 이규갑, 최익수, 진수린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거나 자금을 지원하였다. 이규풍, 이민화, 이일영, 이세응 등 이순신의 후손을 비롯하여 많은 수의 아산 사람들이 독립군으로 만주와 연해주에서 목숨을 걸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박안라, 오세라, 이애라 등 엿어들도 함께 활동하였다. 아산사람들은 그밖에도 형평운동, 의열단 활동(홍가륵), 농민운동, 사회운동, 천도교 멸왜기도운동 등 다양한 항일민족운동을 펼쳤다.
□ 비밀결사 활동 - 의병장 곽한일은 고종의 밀명으로 조직된 독립의군부에 참여해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성달영.성문영 형제와 강석주는 대한광복회에 가담해 활동하고 친일파 도고면장 박용하 처단을 지원하여 고초를 겪었다.
□ 3.1운동(3.1혁명) - 1919년 3.1운동 당시 아산에서는 온양초등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시작하였고, 아산의 12개 면 모든 지역에서 다양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장터에서는 만세시위 외에도 각 지역의 마을 근처 산꼭대기 50여 곳에서 불을 피우고 만세를 외치기도 하였고, 주재소나 면사무소 습격, 광혈 파괴 등 폭력적으로 전개하기도 하였다.
□ 무장독립전쟁 - 3.1운동 이후 이규갑, 최익수, 진수린은 임시정부에 참여하거나 자금을 지원하였다. 이규풍, 이민화, 이일영, 이세응 등 이순신의 후손을 비롯하여 많은 수의 아산 사람들이 독립군으로 만주와 연해주에서 목숨을 걸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박안라, 오세라, 이애라 등 엿어들도 함께 활동하였다. 아산사람들은 그밖에도 형평운동, 의열단 활동(홍가륵), 농민운동, 사회운동, 천도교 멸왜기도운동 등 다양한 항일민족운동을 펼쳤다.
아산의 항일의병 운동
아산사람들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항일의병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이듬해 자행된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항일의병이 일어나자 송악의 곽한일은 경기도 안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군.일본군에 맞서 싸웠고, 1905년의 을사늑약 이듬해에 일어난 홍주의병에도 참여하여 돌격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이 홍주의병에는 송악의 강태건과 남규진, 온양의 유진원, 도고의 성재한 등도 참여하였다.
1907년 고종폐위, 군대해산 등 일본의 국권침탈에 맞서 의병전쟁이 계속되었다. 이때 송악의 이성렬은 집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여 여주.안성에서 의병에 참여하였고, 서병림은 온양에서 수십 명의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충북 제천으로 가서 활약하였다. 의병투쟁은 후에 독립군 활동으로 이어졌다.
한편, 배방의 홍필주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저지에 앞장서고 대한자강회 등에 참여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아산사람들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한 항일의병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이듬해 자행된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항일의병이 일어나자 송악의 곽한일은 경기도 안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군.일본군에 맞서 싸웠고, 1905년의 을사늑약 이듬해에 일어난 홍주의병에도 참여하여 돌격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이 홍주의병에는 송악의 강태건과 남규진, 온양의 유진원, 도고의 성재한 등도 참여하였다.
1907년 고종폐위, 군대해산 등 일본의 국권침탈에 맞서 의병전쟁이 계속되었다. 이때 송악의 이성렬은 집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여 여주.안성에서 의병에 참여하였고, 서병림은 온양에서 수십 명의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충북 제천으로 가서 활약하였다. 의병투쟁은 후에 독립군 활동으로 이어졌다.
한편, 배방의 홍필주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저지에 앞장서고 대한자강회 등에 참여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아산의 동학농민 혁명
아산에는 1880년대 초에 동학이 전파되었고 1892~3년의 교조신원운동 과정에서 동학교도들이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런 가운데 정부의 탄압과 일본 등 외세의 침략에 맞서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에 들불처럼 일어났다. '보국안민, 제폭구민, 척양척왜'를 외치며 일어난 반봉건적, 반외세적 민족운동이었다.
아산의 동학농민군은 1894년 가을의 '2차 봉기' 중 충청남도 서북부의 내포지방, 동학농민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신교, 정태영, 김경삼, 곽완, 안교선 등이 아산지역 지도자였고 인근 지역 동학농민군과 함께 내포 각지에서 활동하였다.
봉기 이후 아산현 관아 공격, 당진 승전목 전투, 예산 신례원 전투 등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승리하였으나 홍주성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그 뒤 처형, 탄압, 약탈 등 끔찍한 보복을 겪어야 했다.
그런 시련을 이겨내며 아산의 동학농민혁명은 항일의병과 3.1만세운동 등으로 계승되었다.
아산에는 1880년대 초에 동학이 전파되었고 1892~3년의 교조신원운동 과정에서 동학교도들이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런 가운데 정부의 탄압과 일본 등 외세의 침략에 맞서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이 전국에 들불처럼 일어났다. '보국안민, 제폭구민, 척양척왜'를 외치며 일어난 반봉건적, 반외세적 민족운동이었다.
아산의 동학농민군은 1894년 가을의 '2차 봉기' 중 충청남도 서북부의 내포지방, 동학농민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신교, 정태영, 김경삼, 곽완, 안교선 등이 아산지역 지도자였고 인근 지역 동학농민군과 함께 내포 각지에서 활동하였다.
봉기 이후 아산현 관아 공격, 당진 승전목 전투, 예산 신례원 전투 등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승리하였으나 홍주성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그 뒤 처형, 탄압, 약탈 등 끔찍한 보복을 겪어야 했다.
그런 시련을 이겨내며 아산의 동학농민혁명은 항일의병과 3.1만세운동 등으로 계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