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전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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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 51
탐방로그
충남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 51 김인전선생의 생가터 뒤 산9-1 구 한영학교터를 찾아왔다. 학교터 뒤에는 김인전선생의 추모비가 서있다. 와초리 복지회관에서 김인전 선생 추모비까지는 329m로, 도보로 5분 정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충남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 51 김인전선생의 생가터 뒤 산9-1 구 한영학교터를 찾아왔다.
학교 터 뒤에는 김인전 선생의 추모비가 서있다.
경재 김인전(1876. 10. 7 ~ 1923. 5. 12) 선생은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셨다. 1906년 가산을 정리하여 교육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한영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14년 독립운동 비밀결사회인 송죽형제회를 조직하고 1919년 3.1만세운동의 전라북도 지도자로 만세운동에 관여하였으며, 1920년 인성학교 교장으로 교육현장에서 직접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22년 중국상해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유지강화 등 독립운동의 활성에 온 힘을 쏟으며 한국 노병회를 발기하는 등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시다 1923년 5월 과로로 순직하였다.
정부에서는 1993년 중국에서 선생의 유해를 봉환하여 국립묘지 임시정부 묘역에 안장하였으며, 2004년 3월 김인전선생추모사업추진위원회에서 선생의 나라사랑정신을 후세에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흉상을 건립하였다.
선생의 휘는 인전이고 경재는 그의 호이다. 김해김씨 탁영자 김일손 선생의 15대 손으로 1876년 충남 한산면 지촌에서 부친 김규배공과 모친 김씨사이의 2남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시이래 향리 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이후 유,불,도 3교를 학문으로 연구하여 경지에 이르기도하였다. 후일 상해임시정부에서 만난 한학, 서예에 두루 능한 해공 신익희선생이 나는 "경재선생에게서 한학을 다시 배웠고 구분의 학덕에 감복하였다"고 술회한바 있는 것으로 선생의 한학을 가름하고도 남는것이된다. 유청소년기를 향리에서 학문으로 보내며 30대에초반이 된 선생의 이때가 마침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오조약이 체결되어 나라가 실로 풍전등화와 같은 때였다. 부친 김규배공이 수원군수를 역임하고 월남 이상재선생과 같이 황성기독교 청년회에도 가입한(1904년) 선각자로 향리의 집안이 서울소식에 밝았다. 선생은 즉시 사숙에서의 학문을 폐하고 대신 향리에 한영학교를 개설 인근의 청소년들을 모아서 애국심함양과 배일독립정신의 고취가 선생의 일이되었다. 그러나 그런중에도 일제의 만행은 그 보속이 빨라서 마침내 1910년 결술 한일합방의 날은 오고야 말았다. 선생은 그해에 한영학교를 계부에게 인계하고 장차 목회자가 되기위하여 부랴부랴 멀리 평양까지 가서 그곳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는 조국과 민족의 현실이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신과 희생을 요구하는 상황으로 급변하고 있는것을 인식 그를 배워 실천하기위한 것이었다. 동학교는 후일 3.1운동에 민족대표로 활약한 이승훈선생과 길선주, 양전백 목사 그리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한 송병조선생등 많은 민족지도자를 배출한 서북지역 독립운동의 요람이
다. 선생은 동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나라잃은 동포를 구해야 한다는 민족운동의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였을 뿐만아니라 동기생이던 송병조선생과는 평생의 지기이자 동지가 되고도 하였다. 매일 수업이 있는 학교가 아니므로 선생은 재학중에도 향리에 있는 완폰교회의 장로가 되고, 군산영명학교의 임시교사가 되기도 하며 젊은 이들을 상대로 하는 배일 민족의식의 고취가 선생의 일이 되는것은 어느곳에나 같은 것이었다. 졸업후에는 전주 서문외교회의 목사가 되어 이번에는 그곳에 모여드는 젊은이들을 상대로 기독교의 진리에 입각한 배일 민족주의의 애국사상고취가 선생의 일이었다. 특히 선생의 설교는 언제나 일제의 압제에서 고통을 받는 우리민족을 구워하는 일이 곧 없는자, 못가진자를 사랑하는 기족의 정신이다-가 주제가 되었다. 선생의 못가진자를 사랑하는 기독의 정신은 말뿐만이 아니고 실제로 선친이 매년 인근의 수백빈민을 상대로 아민을 먹이는 일을 하기때문에 듣는이들에게보다 실전을 더하는 설교가 되기도 하였다. 선생이 담임하는 교회에는 인근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등의 교사 와 학생이 자리를 매웠다. 교사들은 선생의 영향으로 그들의 학교에서 암암리에 민족교육을 실시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학생들은 비밀리에 독립단체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중 하나가 기천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조직한 독립운동비밀결사단인 송죽형제회였다. 이런중에 1919년 3.1운동의 해가 되어 선생은 담임교회가 있는 전주와 향리에서 동시에 동운동을 추진지도하였다. 전주에서는 스스로 선두에서 고향리인 서천에서는 한영학교 제자들이 앞장섰다. 유명한 사천 마산 새장터의 시위운동자들이 모두 한영학교 또는 완보교회 출신들이었던것은 당시의 기록들이 지금도 여러곳에 남아있다. 마신신장리에 동아일보사 후원으로 세워진 3.1운동기념탑에도 그 기록은 있다. 3.1운동이후 일제의 탄압과 감시가 심해지자 선생은 중국 상해로 망명 그곳 대한국임시정부에 합류 활동하였다. 1920년에는 상해대한인민거류민단 의원 17명중의 1인이되고 임시정부의정원 정무, 조사특별위원이 된다.1921년에는의정원 부의장, 전원위원장이 되기도한 다. 특히 이해에 선생은 임시정부의 학무차장, 총장대리가 되고 상해교민단에서 운영하는 인성학교 교장도 되는데 이는 후일 해공 신익희선생이 술회한 바와같이 선생의 학문이 그만큼 깊었던것을 말해주는것이된다. 1922년 4월에는 의정원 제4대 의장에 선출된다. 이후 선생은 의정원의장으로 민의를 수렴한 입법활동, 임시정부의 유지강화, 독립운동의 활성화에 온 힘을 쏟았다. 이해 10월에는 김구, 김인전, 조상섭, 이유필, 여운형, 손정도, 양기은등 7인이 한국노병회 조직하기위하여 발기인이 되고 그중 글에 능한 김인전, 이유필이 기초위원이 된다. 이 일은 결국 성삭되어 선생은 한국노병회(이사장 김구) 이사가 되고 경리담당이사를 겸하게 된다. 그로써 선생은 장차 구국의 군인 양성을 위한 자금을 조성하는데의 책임자가 된다. 이때 선생은 향리의 사잴글 모두 처분하여 상해임정의 보녕회 기금에 충당한다. 그 일은
지금도 선생의 높은 애국심을 찬향하는등 아름다운 일화로 향리에는 전해지고 있다. 1923년 1월 독립운동계에서는 당연 중요행사가 되는 국민대표회의가 상해에서 개최되었다. 전라도 대포로 참석한 선생은 각지역및 단체의 대표자들과 조국광복의 새로운 방략모색과 독립운동세력의 통폐합등을 위한 토론을 2월, 3월에 걸쳐 연일 벌여가느라고 피로가 겹으로 쌓인데다가 4월에도 그만큼으로 중요한 일이 선생에게는 또 있었다. 한국노병회 제1회 정기총회에서 자금 51원을 모금 독립군사령관 김규식선생에게 보내는 일이었다. 그일을 담당할 위원으로 선생등 8인이 선임되었는데 동지들과 더불어 국가의 장래를 토론하는데만도 2,3일에 걸리고 그때마다 선생은 강개로 지친 심신을 가느지 못하고 급기야 졸도에 이르렀다. 그러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몸이 되어 다음달 5월 12일에 상해동인병원 에서 48세를 일기로 역책하시었다. 유해는 상해 프랑스 조계 내외인 묘지에 안치되었다가 후일 중국정부에서 이장하여 상해 송경령능원에 다시 안치되고 1993년 박은식, 신국식, 노백린, 안태국선생등과 함께 고국으로 봉환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보다 먼저 1980년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높이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제 선생의 향리를 중심한 서천군민의 뜻을 모아 여기에 선생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