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갑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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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308-2
탐방로그
애국지사 김갑수 선생의 묘는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308-2에 있으며, 월남 이상재 선생 생가 및 전시관 지척에 위치하고 있다. 한산면 종지리 263에 위치한 월남 이상재 전시관 옆에는 월남 이상재 선생이 세운 종지교회가 있으며, 여기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김갑수 선생 묘소가 나온다. 김갑수(金甲洙) 선생은 1894년 한산면 종지리 월남 이상재 선생 뒷집에서 태어났으며 1907년 상경하여 월남 선생 댁에 기숙하며 언더우드가 설립한 경신학교를 다녔다. 이 때 함께 공부한 이들이 제 2공화국 때 총리를 지낸 장면, ‘논개’ 라는 시로 유명한 시인 변영로 등이다. 그의 묘소에는 묘비와 공적비가 세워져 있으며, 한강독립정이란 이름의 김갑수 선생의 호를 딴 정자가 세워져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座右銘(좌우명)”
勿以感情使用(물이감정사용) 當以理性判斷(당이이성판단)
감정을 사용하지 말고 마땅히 이성으로 판단하라

종지교회는 1904년 월남 이상재 선생께서 투옥 중 기독교로 개종 석방 후 고향 종지리에 교회 설립의 뜻을 피력하자 선생의 선친인 김영성 선생은 월남의뜻에 적극 찬동 협력하여 종지교회를 설립하였으며 교회 설립부터 20여년간 김영성 선생(현 종지교회 김정자 권사 시조부)은 교회를 섬기시다. 손자 석중 근수 동중 상신
유적비가 있는 곳의 정상에는 돌로 만든 정각이 세워져 있었다.
僞善之道(위선지도)
韓岡亭(한강정)
한강독립정(韓岡獨立亭)
앞에는 백제를 지켰던 건지산성이 뒤로는 철새를 불러 모 으며 옥토를 기름지게 하는 호수가 있고 아주 먼 옛날 천왕사(天旺寺)가 자리했으며 기암 괴석이 솟아있는 야산(野山) 정상에 한강 김갑수 할아버지께서 어린 시절 꿈을 키웠던 곳 어려서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학문에 뛰어난 할아버지께 서는 상경 후 물리학(物理學)공부를 위해 독일 유학 중 일제 식민지 통치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활동하시다 충청도를 대표하는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議政院) 의원(議員) 등으로 조국 광복을 위해 평생 헌신하신 애국지사 한강 김갑수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우리 후손들이 본을 받고 영구보존키 위해 뜻을 모아 이곳에 정각을 건립합니다.
서기 2005년 11월 28일
친족대표 석중 글
하지바위
1999.6.22
이상재 선생 생가에서 보이는 종지교회. 월남 선생께서 설립한 교회라고 한다.
앞에 본 종지교회 설립 시 월남 선생을 도와 자금을 지원했고, 독립운동 때 중요한 역할을 하셨던 김갑수 선생의 유적비와 묘소가 바로 옆에 있어서 찾았다.
송강 정철의 훈민가

아바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르시니
두분 곳 아니시면 이 몸이 사라실가
하날 가든 기업산 은덕을 어데다혀 감사오리

어버이 사라신제 섬길일란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엇디하리
평생에 곳이 못할 일이 잇뿐인가 하노라

애국지사 묘소 입구 →
韓岡 光山金公 諱 甲洙 之墓 配 金海金氏 祔
(한강 광산김공 휘 갑수 지묘 배 김해김씨 부)
愛國志士 韓岡 光山金公 諱 甲洙 遺蹟碑
(애국지사 한강 광산김공 휘 갑수 유적비)
김갑수 선생 비문
애국지사 김갑수 선생은 1894년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 264번지에서 선친 김영성님의 장남으로 출생하셨다. 5세때에 이미 천자문을 띄고 11세때에는 사서삼경에 통달하여 신동으로 불리웠다. 1903년(9세때) 이웃에 살던 월남 이상재 선생의 발의와 선친의 재산 출연으로 설립된 진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의 초등과정을 마치셨다. 1907년(13세때)에 상경 경신학교와 YMCA 영어학교에서 계속 7년간 수학하는 동안 월남 선생댁에서 줄 곳 기거하면서 학업에 정진하여 변영로 장면 등과 더불어 최우등의 성적을 올리기도 하였다. 1915년 21세때 중국 상해로 건너가 독립남양대학에서 여운형 서병호 등과
함께 수학하면서 재해외 조선인 유학생회의 활동을 주도하는 등 항일운동에 참여하였다. 1918년(24세)때 애국동지들을 규합하고자 국내에 들어왔다가 군산에서 왜경에게 체포되어 심란 고문을 당하고 수감 중 한인 순사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상해로 돌아갔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부터 3년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의정원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임시정부 발행 국채를 가지고 국내에 들어와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때 선생은 전북 출신인 김인전 목사 임시정부 정부의정원 의원 윤건중 등과 교우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21년(27세)때 상해 임시정부에서 파송하는 유학생 16명을 인솔하고 독일에 유학하여 뷔이그즈대학에서 4년간 물리학을 전공하였다. 당시 형편이 어려워 안봉근님(안중근 의사의 동생)의 주선으로 산토실링 수도원에서 몇 달동안 기식한 일도 있으며 온갖 난경을 극복하고 면학하는 가운데 4년동안 독일 유학생회(유학생 68명) 회장을 맡아 크게 활약하는 등 실력과 덕망이 출중하였다. 1926년(32세)때 서울로 돌아와 배재학교 교감으로 봉직하다가 왜경의 미행과 강압에 견디다 못해 6개월 후 북간도 용정으로 건너가서 동흥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7년(33세)때 학우 윤건중 님의 권유로 귀국 한국인의 자력으로 전북 완주군에 처음 설립된 봉상산업조합의 이사가 되어 민족자본의 육성과 임시정부 자금 마련에 진력하였다. 그러던 중 불의의 부상과 과로로 신환을 얻어 1938년 8월 15일 45세의 일기로 애석하게도 영면하셨다. 대한민국정부는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애국적 생애를 높이 평가하여 1993년 광복절에 고인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일제에 강점당한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하여 고난의 일생을 살다가신 선생의 애국적인 삶은 이 나라의 역사에 길이 빛날 것이며 만인의 가슴속에 영생하는 귀감이 될 것이다. 2001년 4월 13일 산민 한승헌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