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성주리 494-2
- 탐방로그
- 애국지사 이기풍 선생의 묘소는 서천군 장항읍 성주리 494-2에 자리하고 있다. 길가에서 조금 들어간 숲 속에 있으며 묘비와 상석이 놓여있다. 해당 비석은 1981년도에 건립되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공의 휘는 기풍이요 관은 나주이시니 시조 금성대군의 18세손이신 고 휘 병규공과 비 전주이씨의 2자로 1895년 을미1월 13일 황해도 벽성군 가좌면 국봉리에서 출행하시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치가 출중하여 족히 신구학문을 병수하시더니 20의 약관으로 인근숙산으로 나아가 배양학원의 교사직을 맡아 민족개화의 선봉이 되시었다. 차제에 세계1차대전이 종반에 이르러 미국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상해에는 신한청년당이 조직되고 만주노령에서는 무오독립선언이
되매 미구에 국내에서도 일대 봉기가 있을것을 예견하고 동지 진학철과 더부러 인접 사인면의 유지 이기영등과 내통하며 항상 국권회복운동에 나설 기회를 엿보던중 1919년 3월 민족대표들에 의한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선언이 있자 이에 호응하는 만세시위를 전개코저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제작한 후 동월 11일 사리원 장꾼들을 격동하니 군중의 수 근 300인이 행렬을 짓고 도심을 향하는데 때마침 출동한 일헌들의 제지를 당하자 공을 위시한 군중은 더욱 맹위로써 그와 맛섰다. 오후 늦게 형세가 전도되어 대로와 골목길에 검문이 시작되자 공은 피할길 없어 피집되어 평양공소원에서 1년 6월 실형 언도를 받으시니 즉시 불복항소하시기를 한인이 한국을 되찾으려함은 만국의 평화정신이 인정하는 바인데 어찌하여 일본은 이를 죄로 다스리려 하는가 그래도 형벌을 주장하거든 어디 만국을 책하여보라 하시었다. 동년 5월 29일 항소가 기각되고 익년 9월에 출옥한뒤로는 매양 일경의 미행을 당하시면서도 교단을 고수하시더니 1936년에는 본군 장항으로 이주하시어 오로지 향민의 교화 개명에 힘쓰시었다. 1945년 8.15민족해방을 보시고는 이로써 생애의 영화를 향유한 것이라면서 조용히 주민들과 고락을 함께 하시다가 1974년 4월 10일 서거하시니 서천군 장흥읍 성주동 산494의 2번지에 손자되시다. 정부에서는 공의 생시 공로를 기리고저 1977년 12월 13일 건국공로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니 이에 그 사적을 새겨 이 비를 삼가 세우노라.
1981년 7월 일
서천군수 박재훈 근수
서천군수 박재훈 근수
서천군 장항읍 성주리 494-2 애국지사 이기풍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愛國志士 李公 基豊 之墓(애국지사 이공 기풍 지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