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79
- 탐방로그
- 해미면 3.1만세운동 표지석은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79 해미읍성 진남문 앞에 위치한다. 정확한 위치는 해미읍성 진남문 앞 길 건너편 보도이다. 이 곳은 1919년 3월 해미면의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3.1운동 만세터
3.1운동 만세터
1919년 3월 19일, 3월 24일 해미면민들이 3.1운동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19일 남상철(南相喆)이 면민들과 독립만세를 부르며 읍내 일대를 활보하였다. 3월 24일에는 면사무소 서기 이계성(李啓聖)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는 해미공립보통학교 졸업생 김관용(金寬龍).이봉이(李鳳伊).유한종(劉漢種).최흥량(崔興良)과 재학생 장기남(張基南).양태준(梁泰準).이기신(李起信) 등에게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호소하였다. 밤 11시경 유세근(柳世根).김연원(金然源).한신우(韓信遇) 등 기독교인 및 주민들과 집결하여 해미 뒷산에 올라가 횃불을 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극기를 흔들며 횃불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이들은 남문과 서문을 지나 읍내리의 면사무소와 우(牛)시장에 가서 김관용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주재소로 이동하던 중 출동한 일제 경찰들과 충돌하여 200여 명이 체포되고, 김관용.이계성 등은 태형 90도에서 징역 1년의 악형과 옥고를 겪었다. 해미지역 3.1운동 만세시위는 면서기, 학생,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면민이 연합하여 전개한 시위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1919년 3월 19일, 3월 24일 해미면민들이 3.1운동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19일 남상철(南相喆)이 면민들과 독립만세를 부르며 읍내 일대를 활보하였다. 3월 24일에는 면사무소 서기 이계성(李啓聖)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그는 해미공립보통학교 졸업생 김관용(金寬龍).이봉이(李鳳伊).유한종(劉漢種).최흥량(崔興良)과 재학생 장기남(張基南).양태준(梁泰準).이기신(李起信) 등에게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호소하였다. 밤 11시경 유세근(柳世根).김연원(金然源).한신우(韓信遇) 등 기독교인 및 주민들과 집결하여 해미 뒷산에 올라가 횃불을 놓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극기를 흔들며 횃불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이들은 남문과 서문을 지나 읍내리의 면사무소와 우(牛)시장에 가서 김관용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어 주재소로 이동하던 중 출동한 일제 경찰들과 충돌하여 200여 명이 체포되고, 김관용.이계성 등은 태형 90도에서 징역 1년의 악형과 옥고를 겪었다. 해미지역 3.1운동 만세시위는 면서기, 학생,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면민이 연합하여 전개한 시위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79 해미읍성 진남문 앞 3.1만세운동 표지석을 찾았다.
鎭南門(진남문)
서산해미읍성(瑞山海美邑城) / 사적 116호 서산해미읍성 /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32-2번지 일원
이 성(城)은 고려말부터 많은 피해를 준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절도사영(忠淸兵馬節都使營)을 해미로 옮기기로 하면서 1417년(조선 태종 17)부터 1421년(세종 3)까지 축성(築城), 충청도의 전국(全軍)을 지휘하던 병마도절제사영(兵馬都節制使營)이다. 1652년(효종 3)년까지 230여년간 병마도절제사영(兵馬都節制使營)의 기능을 하였으며,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 현감이 이 성에 옮겨와 겸영장(兼營將)이 되면서 해미읍성이 되었다. 호서좌영으로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243년간 내포지방 12개 군현의 군권을 지휘했던 곳이다. 낮은 산(山)과 평지를 이용하여 쌓은 평산성(平山城)으로 성곽의 하단은 큰 돌로 쌓고 위로 오를수록 작은 돌을 사용하였는데 안쪽은 흙으로 채웠다. 성문은 동,서,남 세 곳에만 있고 북에는 암문(暗門)이 있다. 주 출입구인 진남문(鎭南門)은 다듬어진 돌로 된 아치형 홍예문(虹霓門)이다. 성 밖에는 해자가 둘러져 있는데, 발굴조사를 통해 북쪽해자의 일부를 복원해 놓았으며, 기록에는 성벽 위에 여장(女墻)과 옹성(擁城)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성곽 둘레는 1,800m, 높이는 5m로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탱자나무가 심어져 한자음을 취한 지성(枳城)이라고도 한다. 이 읍성에는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집무하던 동헌(東軒)을 비롯한 관아(官衙)와 객사(客舍) 등의 건물이 꽉 들어차 장관(壯觀)이었다고 한다. 1578년(선조 11)에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적이 있으며, 조선시대 말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성(城)은 고려말부터 많은 피해를 준 왜구를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절도사영(忠淸兵馬節都使營)을 해미로 옮기기로 하면서 1417년(조선 태종 17)부터 1421년(세종 3)까지 축성(築城), 충청도의 전국(全軍)을 지휘하던 병마도절제사영(兵馬都節制使營)이다. 1652년(효종 3)년까지 230여년간 병마도절제사영(兵馬都節制使營)의 기능을 하였으며, 청주로 옮겨간 후 해미 현감이 이 성에 옮겨와 겸영장(兼營將)이 되면서 해미읍성이 되었다. 호서좌영으로 1895년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 243년간 내포지방 12개 군현의 군권을 지휘했던 곳이다. 낮은 산(山)과 평지를 이용하여 쌓은 평산성(平山城)으로 성곽의 하단은 큰 돌로 쌓고 위로 오를수록 작은 돌을 사용하였는데 안쪽은 흙으로 채웠다. 성문은 동,서,남 세 곳에만 있고 북에는 암문(暗門)이 있다. 주 출입구인 진남문(鎭南門)은 다듬어진 돌로 된 아치형 홍예문(虹霓門)이다. 성 밖에는 해자가 둘러져 있는데, 발굴조사를 통해 북쪽해자의 일부를 복원해 놓았으며, 기록에는 성벽 위에 여장(女墻)과 옹성(擁城)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성곽 둘레는 1,800m, 높이는 5m로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성 주변에 탱자나무가 심어져 한자음을 취한 지성(枳城)이라고도 한다. 이 읍성에는 병마절도사와 겸영장이 집무하던 동헌(東軒)을 비롯한 관아(官衙)와 객사(客舍) 등의 건물이 꽉 들어차 장관(壯觀)이었다고 한다. 1578년(선조 11)에 이순신 장군이 군관으로 10개월간 근무한 적이 있으며, 조선시대 말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표지석은 읍성 맞은편 길 건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