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헌태 독립투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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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산66
탐방로그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산66 진주정씨 사당 동은사(東隱祠)앞 정헌태 독립투사비를 찾았다. 해당 비석은 진주정씨 대제학공파 종친일동이 서산시의 후원에 따라 건립하였으며, 2007년 10월 세워졌다. 근래 검색을 하면 서산시에서 독립지사 사적에 QR코드를 제막했다는 보도자료를 보았는데 이런식으로 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스캔하니 아래 주소를 링크하고 있었다.
https://www.seosan.go.kr/welfare/selectBbsNttView.do?key=6390&bbsNo=1784&nttNo=24168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晋州鄭公憲台獨立鬪士碑(진주정공 헌태 독립투사비)
제813호 훈장증 고. 정헌태
위는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건국훈장 독립장
2005년 8월 15일
대통령 노무현
국무총리 이해찬
이 증을 건국훈장부에 기입함
행정자치부장관 오영교

공적개요
1919년 서울에서 3·1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동년 음력 11월 대한의군부 모연대에 소속되어 간도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중 체포되어 옥고
1927년 신간회 동경지회 간사, 신간회 경성지회 조직부 상무간사등 역임
1927년 고학당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선학생혁명당을 조직
1932년 대전형무소로 이감도중 '조선민족독립만세' 등을 절규하다 징역 8월을 가형받음
활동의 의의
3.1운동, 독립군으로 군자금 모집운동을 하였음
1929년 광주학생운동 당시 서울지역의 동조시위를 주도했던 조선학생혁명당(조선학생전위동맹의 전신)을 결성하는 등 학생운동의 조직화에 노력함

학력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일본 니혼대학 전문부 사회과
진주정씨 대제학공파 종친일동
서산시 후원
서기 2007년 정해 10월
근래 검색을 하면 서산시에서 독립지사 사적에 QR코드를 제막했다는 보도자료를 보았는데 이런식으로 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獨立鬪士 鄭憲台公 碑記 (독립투사 정헌태공 비기)
독립투사 정헌태공 비기
공께서는 1902년 12월 22일 충청남도 서산군 인지면 화수리에서 유학자 상진옹의 장남으로 출생. 1940년 6월 28일 38세로 순국하시기까지 을사늑약으로 상실된 대한의 주권을 되찾고자 일생을 조국광복에 바치신 독립투사이시다. 공께서는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재학시 1919년 3.1운동에 적극참여하면서 만주 간도의 독립군 군자금 모금활동 중 동년 11월 체포 투옥되시고 그 후 1926년 일본대학재학중 재일 조선학생들에게 '조선독립'을 주창 독립의지의 기개와 동경중심의 광복활동에 선봉이었고 1927년 월남 이상재 만해 한용운 민세 안재홍 유석 조병옥등과 함께 '신간호'를 결성 동경지회 간사와 경성본부 특파원과 대표를 역임 국내외의 조직을 강화 광범위한 '민족단일전선' 형성운동에 전념 1929년 광주학생운동당시 유석 조병옥과 함께 동조시위활동을 서울에서 주도했고 1930년 6월 '중앙청년동맹' 회의에서 연설하신 공을 체포, 투옥시킨 일제는 항일독립운동의 주도적 단체 '신간회'를 붕괴시킬 공작수단으로 구심인사인 공을 '조선공산당'의 관계자로 조작 7년 중형을 1923년 6월 언도 하였다. 공께서는 참혹한 옥고 중에도 불굴의 항일저항으로 징역8월의 가형, 모진 고문, 약물투여실험까지 당하여 가누기 힘든 몸으로 1938년 출감 입원치료에도 일경은 늘 감시했고 1940년 6월 28일 밤 10시경 일경들이 공의 병실에 가족을 쫓아내고 20여분 머물고 간 뒤 가족이 들어가 보니 공은 의식불명으로 유언도 못하고 운명하시니 일제는 전염병 시신이라는 거짓구실를 부쳐 화장하여 살해증거를 인멸했고 유택 마련도 저지했다. 공께서는 신구학문의 해박한 지식과 투철한 애국애족의 신념으로 무장된 이론가이며 특히 항일투쟁에는 백절불굴의 투사로서 '幼而學之는 壯而欲行之'의 경구대로 실천한 삶은 조국광복의 초석이 되었기에 조국에 앞날은 공의 위업을 받들어 길이 빛나리라 공의 순국대절을 기리기 위해 2005년 8월 15일 노무현 대통령은 헌법에 의거하여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2007년 10월 서산시와 진주정씨 대제학공파는 위대한 애국자의 대의정신을 천추만대에 전하고 무궁한 민족번영을 영원히 기원하고자 공의 숭고한 생애를 정민에 새겨 선영하 동은사 묘정에 세웁니다.
서기 2007년 10월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일본침략하 한국 36년사'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14집 '대중 투쟁자 자료집'
이균영저 역비한국학연구총서 제3권 '신간회 연구' 역사비평사

정부문서
경성복심법원 '소화 8년 1월 25일 형사 제2부' 정부기록보관소

신문자료
조선일보 1927년 5월 15일자 '성대히 발회한 신간회 동경지부'
1932년 6월 4일자 '열성자에 중형언도'
동아일보 1927년 7월 26일자 '협동조 강연'
1927년 12월 21자 '광주강연회 개최'
1927년 12월 26일자 '밀양신간회 강연회'
동은사 건립사적비
선조의 유덕이 먼 후손에게 영향을 미침은 천리요 후손이 지성으로 숭조봉사하는 것은 인자로서 행할 도리이다. 우리 진주정씨는 대제학 휘 시양에서부터 계대하며 대대로 문학을 상전하고 벼슬길이 끊이지 않고 국가에 공헌이 큰 동부의 거족이다. 그러나 불행이도 11세 휘 천유 호 동은 고려말의 태중대부 홍문관 대제학 도총제삼사좌윤판사공과 증 영의정총의 따님이신 배위 정부인 문화유씨의 묘를 고성 대둔산에 모시었다가 실전하고 12세 휘 제 호 우곡 태종조의 대제학 가선대부 한성좌윤 겸 동지의금부사 증 영의정 시 문열공과 도총무귀수의 따님이신 배위 정부인 원주원씨의 묘를 당초 양주 내송산에 모시고 표석까지 수립했었는데 실전하고 13세 휘 오 태종조 가선대부 행 병조참판공과 관찰사지직의 따님이신 배위 정부인 광주이씨의 묘소를 실전하고 14세 휘 소지 평시서주박공과 배위 숙부인 진주하씨 묘소를 실전하고 15세 휘 계증 진사 하양현감 사헌부감찰공과 배위 숙부인 해주최씨의 묘소를 실전하고 16세 휘 세구 진사 문과사헌부감찰 행 양주목사공과 배위 숙부인 해평윤씨 부 의손의 묘소를 실전했다. 위 어른들의 묘소는 오래되고 단종복위후 여려차례의 병화로 인하여 자손이 유리한 관계로 수호를 못하고 세사를 궐하여 온지 수백년이 된다. 그간 자손들의 통한이야 말로서 어찌 다할것인가! 아 시달(豺㺚)같은 짐승도 부모의 은공에 보답하거늘 항차 사람으로서 어찌 보본하지 않을것인가? 전국의 자손이 합심단성갈력하여 1983년 계해6월에 서산군 지곡면 대요리 축좌 미향에 사우를 신건하고 동은사라 현액했다. 사당안에 신위를 모시고 세향하니 비록 예경에도 없는 바이나 자손들의 성정에서 우라나온 것이니 선조의 신령들이 모두 뜰에 내려오셔서 '오! 나도 자손이 있었구나 내 음으로 도와서 무궁케하히라' 하실것이다. 사당건립의 취지와 전말을 약기하여 이 비를 수립하노니 선조를 숭봉하는 성심이 자손만대에 상전하기를 염원한다.
晋州鄭公諱逸鎬功績碑(진주정공 일호 공적비)
진주정씨 29세손 가산 일호공 공적비
공은 1926년 병인 8월 1일 부 재림과 모 원주원씨 사이에 2남으로 출생하여 전주사범심상과를 졸업하여 한영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45년 일제에서 해방이 되자 뜻한바가 있어 향리 김봉제선생으로
부터 한문을 수학하였다. 배는 전주이씨 영순이며 슬하에 헌량 헌성 균헌 헌곤 헌돈 헌선 6형제와 인숙 혜숙 2녀 8남매를 두었다. 공은 천성이 온후하고 애향 애족심이 투철하여 1957년(정유)부터 종중사업을 시작하여 1984년 갑자보 수단과 1983년(계해)에 사당 동은사 신축사업 1986년(병인)에 동은사적비 가선대부 공조참판공 자헌대부 공조판서공 군자감 판관공 묘비건립 등 많은 공적을 세웠다. 진주정씨 대제학공파 회장 문영공 대종회회장 갑자보 신사보 정서위원을 역임하면서 숭조 돈목에 평생을 헌신하였고 향리에서 충효예절교육에 10여년간 봉임하다가 2011년(신묘) 6월 6일에 향년 86세로 별세하았다. 이에 그 공적을 기리고자 종인들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우다.
동은사(東隱祠)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 산66 진주정씨 사당 동은사(東隱祠)앞 정헌태 독립투사비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