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464
- 탐방로그
- 한국지사 백림 김용환 선생의 묘비는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464 에 위치한다. 이곳은 김용환 선생의 생가이면서 정순왕후의 생가이기도 하다. 김용환 선생의 생가는 그의 아들인 서산시 초대 민선 시장인 김기흥씨가 거주하며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묘비 모양이 다소 특이한데, 이 묘비는 중국 항주에 있던 것을 2003년 12월 31일 국내로 모셔와 생가에 세운 것으로, 묘에는 태극문양이 각인되어 있고 묘비의 겉을 흑석으로 둘러 정비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2003년 조국으로 봉환되어 국립현충원에 안치되었다가 2004년 대전국립묘지 독립유공자 3묘역에 안장되었다. 생가 고택 앞에 있는 백림 김용환의 이 묘비는 국가보훈처 답사반이 중국 절강성 항주시 고탕산에서 발굴하여 국내의 생가지로 이전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광주에서 전사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민의 시호를 받으셨다. 적산공의 차남인 종호공은 장사.....
고택앞에 있는 백림 김용환의 이 묘비는 보훈처 답사반이 중국 절강성 항주시 고탕산에서 발굴하여 국내의 생가지로 이전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선열께서는 성균관에서 수학하시고 관직에 근무하던중 독립운동 중심단체인 조선민족 대동단에 가입 거금의 독립자금을 모금 특수임무 수행을 위하여 중국에 망명하였읍니다. 항주에서 신규식(임시정부 국무총리), 신항(신규식 임정정부 의정원 상무위원), 정항범(임시정부요인)등 망명 욱구지사와 활동중 순국하셨습니다. (독립신문 1919년 9월 13일자 부음기사와 부고). 묘비는 중국에서 조국에 반입 순국선열 생가지에 모셨습니다. 대한의 상징인 태극문양이 각인된 묘비가 오랜 세월 역경을 견디며 그리운 조국품으로 환국하심은 우리역사에 찬연히 빛날것입니다.
묘비에는 태극문양이 각인되어 있으며, 중국에서 발굴하여 그대로 가져와 세운 것이라 더 뜻깊은 묘비이다.
한국 지사 김용환 지묘.
대한민국 11년 10월 11일 립 병좌 지향
지우 신항 서
대한민국 11년 10월 11일 립 병좌 지향
지우 신항 서
순국선열 백림(白林) 김용환(金用煥)지사 묘비는 중국 항주에서 2003년 12월 31일 조국으로 모셔와 생가에 근수(謹竪)하였습니다. 태극문양이 각인된 민족의 애국혼이 담겨있는 묘비를 영원히 보존하여 후세 애국애족 정신의 교훈으로 삼고자 서산시에서 건립하였습니다.
2005년 6월 일 서산시
2005년 6월 일 서산시
김용환 선생의 생가는 그의 아들인 서산시 초대 민선 시장인 김기흥씨가 거주하며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464 백림 김용환 선생의 묘비를 찾아가는 중이다.
이곳은 김용환 선생의 생가이면서 정순왕후의 생가이기도 하다.
이곳은 김용환 선생의 생가이면서 정순왕후의 생가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르네상스라는 영정조시대의 역사를 간직한 곳인 이곳은
아픈 역사의 전면에 서서 몸을 사르며 나라를 지켜내고자 했던 독립운동가 김용환(金用煥)(1892~1919)이 나고 자란 곳이다.
공훈록에는 김용환의 이름을 가지신 애국지사가 5분이 계신다.
아픈 역사의 전면에 서서 몸을 사르며 나라를 지켜내고자 했던 독립운동가 김용환(金用煥)(1892~1919)이 나고 자란 곳이다.
공훈록에는 김용환의 이름을 가지신 애국지사가 5분이 계신다.
한다리 김씨 세거비
역조에 많은 명현을 배출한 경주김씨의 한다리 김씨 집성촌인 한다리마을의 내력을 명기하여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
앞으로는 대교천이 상왕산과 양대산에서 발원하여 용두대에서 합류한 후 단부대를 거쳐 한다리마을을 감싸 흐르고 뒤로는 가야산과 양대산에서 뻗어내려 정기어린 취영봉이 또한 이 마을을 감싸안은 길지에 한다리 김씨가 대를 이어 살게 된것은 400여년전의 일이다.
안주목사를 지내신 환공께서 인근 덕산천에에서 사시다가 이곳으로 옮겨와 집세채를 지었는데 한채는 2남 호설공이 사시다가 자손에게 물려주시고 작은집은 손 단구 자적공이 사셨다. 또 한채는 호설공의 사위 김상남공의 집이었으나 후에 적공의 4남 학주 홍욱공께서 매입하여 사시었다. 기후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자 새로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바로 이곳이 한다리 김씨가 대를 이어오는 터전이다. 고구려 예종때 태자의 스승인 인관공은 안주공의 13대조 이시다. 5대조 자수공은 효?으로 정려되고 고려말 충청도?관찰사에 이르렀으나 조선조 대종이 형조판서로 부르자 불사이성의 대의를 밝히고 자진한 충신이시다. 고조는 평양 소윤을 지내셨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신 근공이시고 증조 영원공은 호조좌랑으로 호조참의에 추증되셨으며 조는 장단부사 희공이시다. 생부 양언공은 정란공신에 제록되시고 청송부사이며 생모는 숙부인 풍덕장씨이시다. 호부 양수공은 공조판관을 지내셨으나 후사가 없어 입계하시니 양모는 고성이씨요 계양모는 상산황씨이시다. 안주공께서는 27세때인 중종 15년(1520년)에 무과에 등과하여 장서, 서흥등지의 수령과 안주목사로 명종조 제민평란의 치적을 남기셨다. 배위는 전주 이씨로 태종의 1남 경령군 제간공 배공의 증손녀 이시다. 공의 장남은 좌승지에 추증된 호윤공이고 차남 호설공은 참봉이다. 호윤공의 자 적공은 안기도찰발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적공의 장남 홍익공은 병자호란때 연산현감으로
역조에 많은 명현을 배출한 경주김씨의 한다리 김씨 집성촌인 한다리마을의 내력을 명기하여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
앞으로는 대교천이 상왕산과 양대산에서 발원하여 용두대에서 합류한 후 단부대를 거쳐 한다리마을을 감싸 흐르고 뒤로는 가야산과 양대산에서 뻗어내려 정기어린 취영봉이 또한 이 마을을 감싸안은 길지에 한다리 김씨가 대를 이어 살게 된것은 400여년전의 일이다.
안주목사를 지내신 환공께서 인근 덕산천에에서 사시다가 이곳으로 옮겨와 집세채를 지었는데 한채는 2남 호설공이 사시다가 자손에게 물려주시고 작은집은 손 단구 자적공이 사셨다. 또 한채는 호설공의 사위 김상남공의 집이었으나 후에 적공의 4남 학주 홍욱공께서 매입하여 사시었다. 기후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자 새로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바로 이곳이 한다리 김씨가 대를 이어오는 터전이다. 고구려 예종때 태자의 스승인 인관공은 안주공의 13대조 이시다. 5대조 자수공은 효?으로 정려되고 고려말 충청도?관찰사에 이르렀으나 조선조 대종이 형조판서로 부르자 불사이성의 대의를 밝히고 자진한 충신이시다. 고조는 평양 소윤을 지내셨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신 근공이시고 증조 영원공은 호조좌랑으로 호조참의에 추증되셨으며 조는 장단부사 희공이시다. 생부 양언공은 정란공신에 제록되시고 청송부사이며 생모는 숙부인 풍덕장씨이시다. 호부 양수공은 공조판관을 지내셨으나 후사가 없어 입계하시니 양모는 고성이씨요 계양모는 상산황씨이시다. 안주공께서는 27세때인 중종 15년(1520년)에 무과에 등과하여 장서, 서흥등지의 수령과 안주목사로 명종조 제민평란의 치적을 남기셨다. 배위는 전주 이씨로 태종의 1남 경령군 제간공 배공의 증손녀 이시다. 공의 장남은 좌승지에 추증된 호윤공이고 차남 호설공은 참봉이다. 호윤공의 자 적공은 안기도찰발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적공의 장남 홍익공은 병자호란때 연산현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