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후득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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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장리 451
탐방로그
항일 애국지사 허후득 선생 기념비는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장리 451 운산면사무소 내에 위치하고 있다. 많은 비석들이 서 있는데, 그 중 항일 애국지사 허후득 선생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2003년 대통령 표창 추서 이후 운산면에서 2004년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항일 애국지사 용곡 허후득선생 기념비
용곡 허후득선생은 운산면 용현리에서 양천허씨 한천공파 31세손으로 출생. 일찍이 화서학파인 존제 유진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한후 향리에서 20여명의 학동을 훈학하던 시기 1910년 나라가 일제에게 병탄되자 그 울분을 억제할수 없던차 1919년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봉하등 인근 마을 주민을 규합하여 만세운동을 할것을 결의하고 1919년 4월 8일 동리의 전주민을 인솔하여 보현산에 올라 격렬하게 횃불시위를 겸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의 이 횃불시위가 얼마나 격렬하였던지 당시 이를 제지하던 일본헌병의 총에 맞아 2명이 즉사하였고 이후로
이 산 이름이 자연스럽게 만세봉(萬歲峰)이 되었다. 선생(先生)은 이 햇불 만세(萬歲)의 주모자로서 일본 헌병(日本憲兵)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였으나 강철(强鐵)이라는 별명과 같이 굳은 선비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1개월 반(一個月半)의 모진 고문을 받고 5월 19일(五月十九日)에 6개월(六個月) 형(刑)을 받고 공주(公州)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붙잡혀갈 때는 동리 주민(洞里住民)을 앞장서 선도하는 혈기가 왕성한 청년(靑年)이었으나 동년(同年) 11월(十一月) 20일(二十日)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한 병자(病者)의 상태로 8개월(八個月)여 만에 방면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 일로 가세(家勢)가 기울어진 상태에서 부인(夫人)의 힘만으로는 가정을 지탱하기가 어려워서 특별(特別)한 치료나 요양이 없었으므로 복역 중 모진 고문으로 허리와 가슴에 깊어진 병이 악화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그렇게 기다리던 조국(祖國)의 815 광복(八一五光復)이 된 지 불과 5개월(五個月) 뒤인 1946년(一九四六年) 1월 30일(一月三十日) 50(五十)세를 일기로 한많은 일생(一生)을 마쳤다. 선생(先生)은 감옥에서 풀려나와서도 26년간(二十六年間) 기회만 있으면 이웃이나 마을 주민들에게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 정신의 고취 함양에 힘썼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2003년(二千三年) 8월(八月) 15일(十五日) 정부로부터 대통령(大統領) 표창이 추서되었다. 이에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면민(面民)의 이름으로 기념비를 세우다.
서기 2004년 4월 19일(西紀 二千四年 四月 十九日)
탄곡 이은우 근식(坦谷 李殷佑 謹識)
운산 윤병석 근찬(雲山 尹炳錫 謹撰)
湖沿招討使李公勝宇永世不忘碑
호연초토사이공승우영세불망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