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응평리 253-1
- 탐방로그
- 부여군 초촌면 응평리 253-1에 위치한 임병직 박사 기념관을 찾았지만, 문이 닫혀 있어서 내부를 탐방하지는 못했다. 임병직 박사 기념관은 이승만을 도와 건국에 이바지한 임병직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기념관이다. 임병직박사기념관, 생가에서 임병직박사 추모비까지는 308m로, 도보로 5분 정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돌아오는 길에서도 '임병직로' 명예도로 안내판을 만날 수 있었다. 이곳의 GPS상의 주소는 초촌면 응평리 405이다.
애국지사 임병직 박사 기념관의 주소는 부여군 초촌면 응평리 253-1이다.
애국지사 임병직 박사 생가, 임병직 박사 추모비
애국지사 임병직 박사 생가, 임병직 박사 추모비
애국지사마을 표지석
애국지사 마을
성명: 임병직 본적: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응평리 운동계열: 미주방면
1913년 이승만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 대학에 재학 중 한국학생평론을 창간하고 편집장이 되어 한국의 사정을 호소하였으며, 이승만이 하와이에 설립한 한인중앙학원, 한국기독학원 등의 육영사업을 지원하였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만행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키고, 독립운동자금 조달활동을 하였다. 이후 이승만의 비서로소 구미위원부에서 활약하면서 일왕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친서를 일본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1941년 4월 20일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가 개최되어 재미 한족연합회가 구성되자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활약하였으며, 1942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국방경비대가 조직되었을 때 선전과 참위로 임명되었고, 1943년에는 구미위원부 무관으로 이승만을 도와 한미 외교 교섭에 기여하였다. 광복 후에는 대통령 특사, 외무부장관, 유엔대사 등을 역임하며 건국에 이바지 하였으며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6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2019. 9. 10 부여군 초촌면 응평리 민선7기 부여군수
애국지사 마을
성명: 임병직 본적: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응평리 운동계열: 미주방면
1913년 이승만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 대학에 재학 중 한국학생평론을 창간하고 편집장이 되어 한국의 사정을 호소하였으며, 이승만이 하와이에 설립한 한인중앙학원, 한국기독학원 등의 육영사업을 지원하였다.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만행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키고, 독립운동자금 조달활동을 하였다. 이후 이승만의 비서로소 구미위원부에서 활약하면서 일왕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친서를 일본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1941년 4월 20일 호놀룰루에서 해외한족대회가 개최되어 재미 한족연합회가 구성되자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활약하였으며, 1942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국방경비대가 조직되었을 때 선전과 참위로 임명되었고, 1943년에는 구미위원부 무관으로 이승만을 도와 한미 외교 교섭에 기여하였다. 광복 후에는 대통령 특사, 외무부장관, 유엔대사 등을 역임하며 건국에 이바지 하였으며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6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2019. 9. 10 부여군 초촌면 응평리 민선7기 부여군수
임병직 박사 기념관은 생가 바로 앞에 건립되어 있었다.
애국지사 임병직 박사 기념관
하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所竹館(소죽관)
임병직 박사 생가
애국지사 임병직 박사 생가
이곳은 일제 식민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신 임병직(1893~1976)박사께서 1893년 태어난 곳으로 선생의 애국.애족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부여군에서 2003년 11월 생가를 복원하였다. 선생은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양민학살, 고문 등의 만행을 여론에 환기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이승만의 비서로서 구미위원에서 활약하면서 일황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친서를 일본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1921년 초에는 임시정부 외교부 참사 황진남과 상해를 출발하여 파리, 런던 등을 순회하며 유럽제국에 일본의 침략 만행을 규탄하는 외교공세를 펼쳤으며, 1941년 4월 20일 호놀루루에서 해외한민족대회가 개최되어 재미한족연합회가 구성되자 그는 김호, 한시대, 김병언등과 집행부 위원에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42년 2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국방경비대가 조직되어 김용성이 사령관에 임명되고, 그는 선전과 참위로 임명되었다. 1943년에는 구미위원부 무관으로 이승만을 도와 한미외교교섭에 기여하였다. 공복 후에는 대통령 특사, 외무부장관, 유엔대사 등을 역임하며 건국에 이바지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6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이곳은 일제 식민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신 임병직(1893~1976)박사께서 1893년 태어난 곳으로 선생의 애국.애족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부여군에서 2003년 11월 생가를 복원하였다. 선생은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양민학살, 고문 등의 만행을 여론에 환기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이승만의 비서로서 구미위원에서 활약하면서 일황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친서를 일본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1921년 초에는 임시정부 외교부 참사 황진남과 상해를 출발하여 파리, 런던 등을 순회하며 유럽제국에 일본의 침략 만행을 규탄하는 외교공세를 펼쳤으며, 1941년 4월 20일 호놀루루에서 해외한민족대회가 개최되어 재미한족연합회가 구성되자 그는 김호, 한시대, 김병언등과 집행부 위원에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42년 2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국방경비대가 조직되어 김용성이 사령관에 임명되고, 그는 선전과 참위로 임명되었다. 1943년에는 구미위원부 무관으로 이승만을 도와 한미외교교섭에 기여하였다. 공복 후에는 대통령 특사, 외무부장관, 유엔대사 등을 역임하며 건국에 이바지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6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임병직 박사 추모비로 향하는 길
안내판이 새롭게 건립되어 있었다.
소죽 임병직 박사 추모비
이 기념비는 독립운동가 임병직 박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78년 9월 1일 추모위원회에서 건립한 것이다. 임병직박사는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양민학살, 고문 등의 만행을 여론에 환기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또한 이승만박사의 비서로서 구미위원부에서 활약하면서 일황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 친서를 일본 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1921년 초에는 임시정부 외교부 참사 황진남과 파리, 런던 등을 순회하며 유럽제국에 일본의 침략 만행을 규탄하는 외교 공세를 펼쳤으며, 1943년에는 구미위원부 무관으로 이승만박사를 도와 한미외교교섭에 기여하였다.
광복 후에는 대통령 특사, 외무부장관, 유엔대사 등을 역임하며 건국에 이바지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6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이 기념비는 독립운동가 임병직 박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78년 9월 1일 추모위원회에서 건립한 것이다. 임병직박사는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양민학살, 고문 등의 만행을 여론에 환기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또한 이승만박사의 비서로서 구미위원부에서 활약하면서 일황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 친서를 일본 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1921년 초에는 임시정부 외교부 참사 황진남과 파리, 런던 등을 순회하며 유럽제국에 일본의 침략 만행을 규탄하는 외교 공세를 펼쳤으며, 1943년에는 구미위원부 무관으로 이승만박사를 도와 한미외교교섭에 기여하였다.
광복 후에는 대통령 특사, 외무부장관, 유엔대사 등을 역임하며 건국에 이바지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6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임병직 박사 추모비
이 기념비는 독립운동가 임병직 박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78년 9월 1일 추모위원회에서 건립한 것이다. 임병직 박사는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양민학살, 고문 등의 만행을 여론에 환기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또한 이승만박사의 비서로서 구미위원부에서 활약하면서 일황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 친서를 일본 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1921년 초에는 임시정부 외교부 참사 황진남과 파리, 런던 등을 순회하며 유럽제국에 일본의 침략 만행을 규탄하는 외교 공세를 펼쳤으며, 1943년에는 구미위원부 무관으로 이승만박사를 도와 한미외교교섭에 기여하였다.
광복 후에는 대통령 특사, 외무부장관, 유엔대사 등을 역임하며 건국에 이바지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6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이 기념비는 독립운동가 임병직 박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78년 9월 1일 추모위원회에서 건립한 것이다. 임병직 박사는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양민학살, 고문 등의 만행을 여론에 환기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또한 이승만박사의 비서로서 구미위원부에서 활약하면서 일황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 친서를 일본 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1921년 초에는 임시정부 외교부 참사 황진남과 파리, 런던 등을 순회하며 유럽제국에 일본의 침략 만행을 규탄하는 외교 공세를 펼쳤으며, 1943년에는 구미위원부 무관으로 이승만박사를 도와 한미외교교섭에 기여하였다.
광복 후에는 대통령 특사, 외무부장관, 유엔대사 등을 역임하며 건국에 이바지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6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林炳稷 博士 追慕碑(임병직 박사 추모비)
시성 소동파는 흘러가는 역사속의 무상한 인생을 탄식하면서 奇蜉蝣於天地(기부유어천지)하니 渺蒼海之一粟(묘창해지일속)이라 했다.
마치 하루살이 마냥 천지간에 엉크러져서 아무러한 일 한가지 해논것 없이 무의미하게 살다가 죽어버리는 인생은 망망대해 창해바다에 던져진 좁쌀 한알 같다는 말이다. 과연 옳은 철학이다. 이 세상 수천억 인구가 북대기를 치다가 보람있는 일 하나 하지 못하고 그대로 하루살이처럼 스러져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임병직박사는 실로 사람다운 일을 하며 살다가 고고하고 청빈하게 세상을 떠난 분이다. 그는 80평생을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애국투사가 되었고 일편설의 명 외교로 국운을 모면한 분이다. 박사는 구한말 갑오경장이후 일제의 침탈로 삼천리 강산의 전국토가 이족에게 병탄되나 망국소년의 비분은 나라안에서 평안하게 살수 없었다. 약관 미청의 소년으로 고국을 등지고 미주에 망명하여 1920년에는 오하이오 주립대학을 졸업한 후에 워싱턴에서 이승만박사와 함께 독립운동에 앞장을 섰고 혹은 이박사의 임시정부 비서관으로 혹은 한미친선위원으로 혹은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으로 대한민국이 광복되기까지 20여년간 독립외교로 청춘시절을 송두리째 바쳤다.
천운이 회복되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외무장관의 중임을 맡아 파란만장한 건국 초기의 어려운 외교를 담당하였고 6.25동란이후 1951년부터 1960년까지 10년간은 유엔대사로 공산국가와 설전을 벌리면서 능란한 수완을 발휘했다.1964년에는 재건국운동 본부장으로 다음해에는 주 인도대사로 1968년에는 국토통일원 고문으로 1971년에는 한국외교협회 회장으로 또는 한미협회 고문으로 1974년에는 반공연맹 이사장으로 1976년에는 세계반공연맹 총회 의장과 아세안 민족 반공연맹 총회 의장으로 활약하여 80평생을 다만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다. 슬프다 1976년 9월 21일 홀연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84세다. 묘소는 동작동 국립묘지이다. 동지들은 한평생을 나라위해 바친 박사의 애국정신을 추모하여 박사의 고택 유허에 추모비를 세워서 역사상에 영생한 박사의 영을 위안한다. 때 마침 정부수립 30년을 맞이하여 이 비를 세우니 박사를 추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1978년 9월 21일 임병직박사 추모위원회 삼가 비를 세운다.
마치 하루살이 마냥 천지간에 엉크러져서 아무러한 일 한가지 해논것 없이 무의미하게 살다가 죽어버리는 인생은 망망대해 창해바다에 던져진 좁쌀 한알 같다는 말이다. 과연 옳은 철학이다. 이 세상 수천억 인구가 북대기를 치다가 보람있는 일 하나 하지 못하고 그대로 하루살이처럼 스러져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임병직박사는 실로 사람다운 일을 하며 살다가 고고하고 청빈하게 세상을 떠난 분이다. 그는 80평생을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애국투사가 되었고 일편설의 명 외교로 국운을 모면한 분이다. 박사는 구한말 갑오경장이후 일제의 침탈로 삼천리 강산의 전국토가 이족에게 병탄되나 망국소년의 비분은 나라안에서 평안하게 살수 없었다. 약관 미청의 소년으로 고국을 등지고 미주에 망명하여 1920년에는 오하이오 주립대학을 졸업한 후에 워싱턴에서 이승만박사와 함께 독립운동에 앞장을 섰고 혹은 이박사의 임시정부 비서관으로 혹은 한미친선위원으로 혹은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으로 대한민국이 광복되기까지 20여년간 독립외교로 청춘시절을 송두리째 바쳤다.
천운이 회복되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외무장관의 중임을 맡아 파란만장한 건국 초기의 어려운 외교를 담당하였고 6.25동란이후 1951년부터 1960년까지 10년간은 유엔대사로 공산국가와 설전을 벌리면서 능란한 수완을 발휘했다.1964년에는 재건국운동 본부장으로 다음해에는 주 인도대사로 1968년에는 국토통일원 고문으로 1971년에는 한국외교협회 회장으로 또는 한미협회 고문으로 1974년에는 반공연맹 이사장으로 1976년에는 세계반공연맹 총회 의장과 아세안 민족 반공연맹 총회 의장으로 활약하여 80평생을 다만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쳤다. 슬프다 1976년 9월 21일 홀연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84세다. 묘소는 동작동 국립묘지이다. 동지들은 한평생을 나라위해 바친 박사의 애국정신을 추모하여 박사의 고택 유허에 추모비를 세워서 역사상에 영생한 박사의 영을 위안한다. 때 마침 정부수립 30년을 맞이하여 이 비를 세우니 박사를 추모하는 마음 더욱 간절하다.
1978년 9월 21일 임병직박사 추모위원회 삼가 비를 세운다.
글 월탄 박종화
전면글씨 운정 김종필
후면글씨 인전 신덕선
석공 백웅기
전면글씨 운정 김종필
후면글씨 인전 신덕선
석공 백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