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구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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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242-1
탐방로그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242-1에 위치한 애국선열 해산 강철구선생 추모비는 장하1리(장정) 애국지사마을 표지석 맞은편에 존재하며, 장정마을 초입에 있다. 애국선열 해산 강철구선생 추모비부터 장하1리 마을회관까지는 약 700m로, 도보로 11분 정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다. 군자금 모금을 더욱 효과적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강경에서 김찬혈 김철수를 영입하는 한편 조직관리에 치중하였다. 22년 10월에야 상경 사제 강용구 집에서 은신활동하면서 이곳을 최적지로 거점화하여 김정제 조창호 김목현 등을 확보하고 박창규 박남규 이기범 등으로 하여금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를 각 면단위로 소화시키도록 하여 막대한 군자금을 조성하여 1942년 연말까지 상해로 송금을 마쳤다. 1942년 11월 19일 미행하던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1943년 9월 23일 목단강 형무소에서 49세를 일기로 옥중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는 중국간도성 동불사촌에서 1991년 광복회장으로 배위는 상산이씨로 해산 강선생과 함께 환국하여 서울현충원에 양위 안치하셨다가 11월 11일 대전현충원에 안장식을 하였다. 유족으로 장자 윤모님과 차자 기모님은 30대에 가족들과 동불사촌을 수시내왕을 했으나 중국 내전 이후 우금 생사를 알 길이 없다. 해산 영애 자매는 최근까지 고국을 방문하고 동북삼성에 산재한 일가 제씨들 생사존망을 전해왔다. 삼자 성모님은 군산상고 교사로 봉직 중 신묘년에 병몰하는 불운을 맞았고 해산의 자부 김정희님이 가권을 이끌고 가업을 계승하면서 평생 교육자로 퇴임하여 동백장을 수장하였다. 장손 현태님은 해산 문호를 지키며 서울대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업에 종사 2000년 11월 인천공항고속도로 영종대교 건설에 참여 국가산업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장, 2009년 10월 인천대교건설공사에 참여하여 국토해양업무발전에 이바여한 공으로 국토해양부장관표창장, 2017년 3월 토목기술 향상을 통하여 국가산업발전에 이바지한 공로가 커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는 등 기술사로서 사회에 공헌하고 있다. 사자 경모님은 성일로 개명하고 16세 소년으로 단신 귀국하여 갖은 간난를 겪으며 이국에 묻히신 양친 유해를 국립묘지 이장의 명분을 갖고 노심초사 중 관계단체의 노력과 유관당국의 배려로 1991년 환국 서울현충원에 안치 1991년 11월 11일 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양친 안장하시다.
서기 2018년 8월 일
전 대전충남광복회 회장 윤석경 감수
부여문화원 이사 강상모 근찬
충남도의회 의원 강용일 근수
유족대표 현태 현석 규언 내영 규홍 규하
愛國先烈 海山 姜鐵求 先生 追慕碑(애국선열 해산 강철구 선생 추모비)
해산 강철구 선생은 1894년 신묘 2월 9일에 원림천군 장정리에서 탄생하셨다. 선계는 고려초엽 박사공 휘 사담의 27대손이신 대종교 사교 호석 강모초 휘 석기 선생과 담양전씨 사이에서 삼형제 중 차자이시다. 성장과정에 출중하고 영민한 재질과 언행의 비범함에 주변으로부터 칭송과 경탄이 적적함에 사서를 공부하는데 경서나 딴 전적까지 독파하였다. 당시 날로 국운은 사양길에 접어들고 종교지도자 가문에 담대한 인물이 나오고 이적을 이룬다는 소문이 일어 문중에 무수한 인재들이 모여 들었으며 그 중에는 대종교도 박로철과 이극로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선생이 23세가 되자 대종교도로서 뜻한 바 있어 북간도 연길현 동불사촌에 들어가 천영학교 교사가 되어 2세들의 민족교육에 심혈을 쏟았으며 1920년 1월에 북로군정서 총재 백포 서일 장군의 비서역을 맡고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 단군사상의 교화와 동지들을 영입 만주 동경성에 천전건립 계획 등을 위한 부지확보 목전인 1923년 3월 31일 재만독립운동의 거물로 지목되어 동년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루게 된다. 1920년 4월 윤정현의 명령으로 고향 부여에 파견되어 박창규 박남규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조달해 가지고 만주로 귀환하여 서무부장 김택에게 수교하였다. 1922년 6월에는 사관연성소 확충자금 모금차 임시정부 발행 공채 3만5천원 상당의 문서를 가지고 재입국하였다. 함북 회령에서 김동진을 청진에서 김동순을 서울에 와서 문용섭을 각지 동지들을 영입하고 동년 9월에는 부여에서 문장섭 김재와 김삼현 문경섭 등 동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