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모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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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242-1
탐방로그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242-1에 위치한 애국선열 강성모 지사 추모비는 장하1리(장정) 애국지사마을 표지석 맞은편에 존재하며, 장정마을 초입에 있다. 애국선열 강성모 지사 추모비부터 장하1리 마을회관까지는 약 700m로, 도보로 11분 정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愛國先烈 姜聖模 志士 追慕碑(애국선열 강성모 지사 추모비)
광복 71주년에 강성모 지사님의 행적을 조명함은 의의가 크다. 선계는 진주강씨 박사공파 휘 계용 28세손
선고 휘 의구와 선비 밀양박씨의 차자로 서기 1915년 을묘 11월 9일에 부여 장하리에서 출생하셨다. 서기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사건이 일자 부여지구의 주동인물 강일 지사의 지시로 조직에 조력하던 중 부
여에서 돌발한 농업보습학교 격문사건으로 전체학생 동맹휴학사태가 야기되어 강일 지사와 류윤복군은 보안
법 및 출판법위반으로 강경재판소에 송치되고 학생대표 백길대군만 무기정학 처리되고 그 외는 방면되었다. 그
러나 조선일보 지국장 노명우 지사를 비롯한 청년층과 유력인사들의 검거선풍이 일었다. 아울러 구국비밀결사를 모의키 위하여 백마강 조개섬에서 연합단체 신간회 금강문인회 농민구락부 등 주역들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선전선동 정보교환 문맹퇴치를 위한 논의에 젊은 강지사는 적극 봉사키로 야학 강사위촉을 받았다. 항일의 틀은 계속되다. 서기 1933년 12월 7일 일제 검거때 동지 강일구 최재봉 장창선 전영철 강병국 조병철 허원범 노명우 강병환 강도성 강성모 등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공주지방법원에 송치된 대사건이었다. 강지사는 서기 1935년 11월 20일에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형의 판결을 받고 출옥은 하였으나 2년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출옥 후 형독을 치료하다가 서기 1937년 만춘에 만주 간도성 연길현으로 이주하였다. 수차 검속되어 회유와 고문 훈방을 거듭하다. 서기 1940년 8월 6일 영서하시니 짧은 26년의 생애였다. 진실은 영구히 묻히지 않고 발은 빛은 영원 굴절이 없는 이치일지니 서기 1986년 12월에야 대통령표창이 추서되고 4년이 경과한 1990년 10월 16일에 건국훈장 애족장 제524호를 추서하시니 유명을 달리한지 51년만이었다. 묘는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 191기에 안장하셨다. 배위 경주 김선월님은 갖은 고난의 반세기를 부덕을 가꾸시며 남매를 육성하시고 고절의 생애를 종하시니 생전의 대전시 중구청장의 표창패 제64호와 함께 강지사 곁에 합부하셨다. 유족으로는 자 현준과 자부 김풍실이 있고 녀 연숙과 서 김령 김정일이다. 장손 규석군은 서울대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스웨덴대의 4년 유힉을 마치고 농학박사 교수로 국가에 공헌하고 있고 차손 규상군은 고려대를 졸업하고 서울철도기관사로 사회에 봉사중이며 손녀 손부들은 초중고 교사 재직중이니 일익가세화목하고 번창하니 어찌 지사님의 음덕이 아니리오.
서기 2015년 11월 1일
충청남도의회의원 진주강씨 부여군 종회장 강용일 찬지
진주강씨 남계공후 사원공 종중 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