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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남도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242-1
- 탐방로그
-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 242-1에 위치한 종문도사교성사 호석 강공 휘 석기 추모비를 찾았다. 강석기 선생 추모비 옆에 강병국 선생 구 묘도 함께 찾을 수 있었다. 종문도사교성사 호석 장석기 선생 추모비는 장하1리(장정) 애국지사마을 표지석 맞은편에 존재하며, 장정마을 초입에 있다. 종문도사교성사 호석 장석기 선생 추모비부터 장하1리 마을회관까지는 약 700m로, 도보로 11분 정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종문도사교성사 호석 강공 휘 석기 추모비
공의 성씨는 강이요 휘자는 석기시며 자는 순서요 호는 호석이며 관향은 진지시다. 이조 철종 14년 임술 6월 22일 장암면 장정리에서 호서문호 임하공의 맏아들로 태어나시다. 공은 어릴적부터 총명하시고 재질이 영특하사 이미 일곱살에 사서삼경을 독파연송하시어 천재의 방명을 떨쳤고 고종8년 경오해 공의 아홉살때 흥산군 백일장지회에 나아가 장원을 하시니 천생 대문장으로 서상을 경악케하신뒤 한양 박동김 정승집에 진학의 특전을 받으시다. 광무 4년 경자해 러시아 세력의 남진으로 관북일대가 폐읍이되자 경흥감리로부임하시어 도덕정치와 능변외교로써 진압하신뒤 성진경에 파견 의친왕배환을 꾀하신중 이듬해 병오 봄 홍성군수로 임명되셨으나 배환도모가 개화당 재판들의 방해로 그치고 국운이 기울음을 통탄하시며 9년간의 관직을 사임하시다. 청년교육사업에 뜻을 두시고 그 해 한성공업전습소를 세우시고 공업학보 창확월보를 창간하시고 처음 수임한 포플러 십만본을 금강연변에사 재배권장하시다. 낙향하사어 공주와 강경에 농공은 만행을 별하시며 천 영
보명학교와 각처에 팔십여 노동학교를 개설하시다. 융희3년 기유해 홍암 나철선생과 더불어 민족 신앙으로 단군숭봉에 귀일 시킨 대종교를 중광하시어 그후 스물세해를 헌신하시다. 경술국치를 맞자 교세를 확장정비하여 계축해 만주화룡현으로 이전 망명하시다. 갑인해 여름 교도를 인솔하시고 백두산 상봉에서 피를 뿌리시며 구국의 제전을 마련하사 많은 우국동포들이 감화봉교하였고 그 해 겨울 러시아 소하령에 망명중인 보재 이상설의 초빙으로 포교순력하시다. 을묘해 길림성 안도현의 토호이며 군벌인 대영규의 간청으로 상부의 예우로 공을 모시니 삼년간 체류 포교하실새 조만동맹체결과 동삼성 동포문을 선포하시다. 기미해 첫봄서 백포장군 김좌진장군등이 공을 불로군정서 총재로 추대했으나 일분군에 의한 교우 대량학살에 비분강개하시어 사양하시고 오직 교리 천명과 사백여개의 교당확보에 전념하실새 그 해 사월 재만교포선동 주모자로 용정촌 일본 총영사관에 피수되어 사형수의 옥고를 겪던중 민중들의 구출봉기가 일어 헌병사령관의 직권으로 해외 거주 금지령을 받고 본국 무산까지 삼백기마병의 호송을 받아 생환하시다. 경신해 대종교 도사교위리의 최고직에 계시매 구한말 전 판서 이재곤 김윤식 서재겸등 노소대관 칠십여명이 입교하매 당황한 조선총독 재등은 삼십만원의 거액과 도지사관작으로 누차 유도하였으나 충의와 청렴으로 거절하시다. 끝내 갑자해 강화도 참성단아래 은거하여 교화사업에 진력하시다. 임술해 대한군정서 총재 비서장이던 차남 철구가 상해임시정부 보연국장으로 전임중 군자금 삼십만원 모금사건으로 공과 일문 오가족이 경성으로 압송 고초를 겪으시매 김병로 허헌 김찬영 문택규씨등 십명의 변호인단이 석달동안 자진 무료 변론으로 계해년에 간신히 면옥하시다. 신미년 이월 열사흘날 왜정의 착고에서 해금되지 못하신채 백의 동포서 두장을 남기시고 조천하시니 향년 칠십이시었다. 유해는 부여면 가증리 봉동산 서록 선산에 봉안하였고 유족으로는 담양전씨와의 사이에 진구 철구 용구의 세 아들과 세딸이며 장남 진구가 공의 문호를 지켜오다. 공이 남기신 저서로 종리문답 도화신사 천산도설 애오가 시조집 인지록등이며 강화도에 공의 기념비가 현존하고 있다.
오호 애석토다 공의 행적을 어찌 다 명기 하리오. 상해유학생회에서는 대표를 파견하여 공의 일생을 추념하는 도중 ?명의 인사가 피검되는 백점민란의 생애이셨다. 공 서거 사십일주년 세대는 몇번 바뀌어 경박한 풍조에 밀려 기억조차 사라져간다. 공은 일생에 두차례의 개명례와 교호 도호등을 다양하게 지내신것은 수난의 경력이 이를 입증하며 한때 삼십만신도의 기둥이었으니 당시 교세를 육당 최남선씨는 독립항쟁의 촌본영이었다고 기술했거니와 공의 동지 문인 저명현사들을 어찌 다 열거하리오. 향중문인으로 박?철교수 노영우 박길화 유기섭등 열사와 지사문장섭 김상배 이호철등 제씨이다. 을유해방후 기축년에 성재 이시영 조성환 조완구 황학수 김승학 안호상선생등과 많은 국회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호석선생 문집편찬위원회의 주관으로 출판도중 경인동란은 어찌된 비극이뇨
오호 애석토다 공의 행적을 어찌 다 명기 하리오. 상해유학생회에서는 대표를 파견하여 공의 일생을 추념하는 도중 ?명의 인사가 피검되는 백점민란의 생애이셨다. 공 서거 사십일주년 세대는 몇번 바뀌어 경박한 풍조에 밀려 기억조차 사라져간다. 공은 일생에 두차례의 개명례와 교호 도호등을 다양하게 지내신것은 수난의 경력이 이를 입증하며 한때 삼십만신도의 기둥이었으니 당시 교세를 육당 최남선씨는 독립항쟁의 촌본영이었다고 기술했거니와 공의 동지 문인 저명현사들을 어찌 다 열거하리오. 향중문인으로 박?철교수 노영우 박길화 유기섭등 열사와 지사문장섭 김상배 이호철등 제씨이다. 을유해방후 기축년에 성재 이시영 조성환 조완구 황학수 김승학 안호상선생등과 많은 국회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호석선생 문집편찬위원회의 주관으로 출판도중 경인동란은 어찌된 비극이뇨
청파호에서 장백영봉을 바라보며 망국의 설움을 달랬고 흥개호가에서 숨을 돌리시고 천산남북수만리를 편력하시며 흥안령 넘어 차거운 사막에 망명의 걸음을 쉬시며 바이칼호에 사무친 구국의 달변은 절세 애국의 효시였도다. 평생을 겸허로 일관하시어 부귀공명은 폐리처럼 여기셨나니 공의 유지를 계승하는 문도라면 이 땅에 떨어진 큰별을 굳이 거론치 않는도다. 다만 거룩한 종교가요 도덕가요 배달민족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이셨음을 겨레의 이름으로 또한 뒷사람된 의무로 길이 추모하나니 공의 이름 영세불명 하시리
대교중광 예순네해(서력 1972년) 삼월 보름
대교중광 예순네해(서력 1972년) 삼월 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