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희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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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가곡리 132
탐방로그
독립투사 검추 박영희 장군 공적비는 2019년 5월에 세워졌으며, 공적비 뒷편에는 박영희 선생 생가가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혼에 공규 지키다가 아버님 주사공을 따라 천리길을 물어물어 찾아가 4년 동거하고 귀향했는데 총독부 요시찰인의 가족으로 모진 박해를 감내해야 했고 1남 2녀를 길렀으니 아들은 용민이고 사위는 정양수 남두현이다. 연구하면서 사적이 묻힐세 종손 병호가 종의를 모으고 뜻있는 인사로 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생가 마을에 공적비를 세우려고 나에게 각할 글을 청하니 실로 만시의 탄을 절감하면서 대한독립 항일투쟁 총사와 박영희 장군 독립투쟁기에 의해 이와 같이 기술한다.

충청남도지사 심대평 근찬 / 청강 안명옥 근서

2018년 무술 9월 일
獨立鬪士 朴寧熙 將軍 功績碑(독립투사 박영희 장군 공적비)
장군의 공적비는 함양박씨 구당공, 소요당공, 명헌공의 헌신적인 노력과 부여군의 지원으로 제막하게 되었습니다.
독립투사 박영희 선양위원회
獨立鬪士 朴寧熙 將軍 功績碑(독립투사 박영희 장군 공적비)
獨立鬪士 朴寧熙 將軍 功績碑(독립투사 박영희 장군 공적비)
獨立鬪士 朴寧熙 將軍 功績碑(독립투사 박영희 장군 공적비)
이곳 부여곡부는 매화낙지를 칭하는 명기로 알려져 고종때 승지 휘 시순이 전거하므로부터 함양박씨가 세거하는데 박문을 주축으로 개화기에 신명의숙을 개설하여 향자제를 가르치므로서 지명인사가 배출한 가운데 승지공의 손자에 휘 영희 계시어 일정때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니 호는 검추이고 두희와 장섭은 구국운동 중 별명이다. 공이 1896년 12월 28일에 출생하니 내부주사 휘 동익의 아드님으로 숙부 휘 동한에게 출계했다. 일찍 신명의숙에서 한학을 익히고 서울로 올라가 휘문의숙에서 신학을 깨쳤다. 위인이 헌앙하여 육척거구에 여력이 과인했고 음성이 우렁차고 언변이 유창했으며 안광이 형형하여 압인의 기가 있었다. 틈으로 무예를 연마하여 심신을 단련하더니 일제에 맞서 국권을 회복하는데는 무력밖에 없음을 간파하고 신명의숙의 은사인 고광 이세영과
함께 홀연히 만주로 떠났으니 때에 공의 나이 19세에 진주김씨와 결혼하여 신행도 하기 전이었다. 만주 간도는 한인이 많이 거주하여 구국운동이 활발한 곳이었다. 공이 그곳 신흥무관학교에서 3년의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졸업과 함께 교관에 임명되었고 학도감을 지냈다. 1919년 북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사령부의 부관 즉 부사령관이었으니 사령관은 백범 김좌진이었고 왕청현에 사관동성소를 설립했으니 소장은 사령관 김좌진이고 공이 사령부 부관으로 학도단장을 겸임했으며 교관은 이장녕 이범석 김규식 김홍국 최상운이었다. 이후 독립군의 군세가 날로 강성하여 도처에서 일군영을 공략한 가운데 청산리대첩은 청사에 길이 빛이나니 청산리는 어떤 곳인가 화룡현 장백산 자락에 있어 충신장에서 백운평에 이르는 60리 내속을 말한다. 일제는 독립군의 뿌리를 뽑기 위해 제19사단은 시베리아에서 남하하고 제21사단은 라남에서 북상했다. 대군을 맞아 싸우는데는 내곡이어야하기에 첩첩 청산 백운평에 진지를 구축하여 일거에 천여적을 섬멸했고 천수평으로 옮겨 기병대 120명을 전멸시켰으며 어랑촌에서는 주둔해 있는 적을 선제 공격하여 천여적을 사살했으나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전후 3차의 교전에 비전투원 포함 천8백명의 병력으로 10배가 넘는 3개 여단을 무찌르고도 전사 120명에 그쳤으니 이는 세계전쟁 사상 보기 드문 전적이었다. 이후 일제의 보복이 악랄하여 수령으로 넘아가 재기를 도모했으나 적군의 배신으로 만주로 내려와 항일운동단체를 규합하여 신민부를 조직하고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여 사관을 양성했으니 신민부의 중앙 집행위원장은 김혁이고 총사령관은 김좌진이고 공은 보안사령관이었다. 때에 소련에 고려공산당이 있어 포용하려고 공이 극동본부가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내왕했는데 갑자기 종적이 묘연했으니 오호 이보다 더한 원통함이 있으리요. 건국 후 1986년에 건국공로 대톨령 표창이 수여되고 1977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부인 진주김씨는 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