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 산80-11
- 탐방로그
- 애국지사 조중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애국지사마을 표지석 (세도면 청송리)에서 애국지사 조중구의 묘까지는 766m로, 도보로 12분 정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진천송씨, 풍양조씨
서기 2019년 03월 공용
서기 2019년 03월 공용
豐壤趙公 康衍 之墓 艮坐(풍양조공 강연 지묘 간좌)
조성민 이곳에 잠들다.
아직도 곳곳에는 너의 체취가 묻어있고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넌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음력 : 1977.10.18. 생 1989.4.27. 졸
아직도 곳곳에는 너의 체취가 묻어있고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넌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음력 : 1977.10.18. 생 1989.4.27. 졸
豐壤趙公 南一 之墓(풍양조공 남일 지묘)
애국지사 비문에 의하면 조중구 지사의 장남되시는 분의 상석이다.
애국지사 비문에 의하면 조중구 지사의 장남되시는 분의 상석이다.
자 영연 경연 재연, 손 성준 성원 성만 성민 성현
서 강신호 유지신 김동성, 외손 강대석 유익선 송호년 송호성 김재환
서기 1984년 갑자 8월 일 근립
서 강신호 유지신 김동성, 외손 강대석 유익선 송호년 송호성 김재환
서기 1984년 갑자 8월 일 근립
문중 묘역 앞에 안내판이 서 있었다.
비아(非我) 조중구(趙重九) 선생 묘소
비아(非我) 조중구(趙重九) 선생 묘소 / (독립운동가, 1880.1.14~1942.7.26)
非我(비아), 나의 모든 自我(자아)는 더 이상 내안이 아닌 구국에 있다"
▶1905. 을사조약으로 외교권 박탈 등 국가통치권 사실상 상실
▶1909. 부여 임천 향리에 천흥학교 설립, 미국으로부터 신한민보 들여와 발행,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구국 항일투쟁을 위한 의병계열 비밀결사 전개
▶1912. 고종의 밀칙을 받은 임병찬 등과 대한독립의군부 조직 및 군자금 모집 조달하던 중
▶1914.5. 일본경찰에 피검(총54명), 인천형무소 1년 여 옥고
▶1917. 출소 후 일제의 감시로 국내항일운동 한계, 중국으로 망명
▶1919.4.13. 상해임시정부 수립,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활동
▶1922.9. 상해 한중호조사 이사회개최 외무부 교제과 간사로 참석, 한중 외교 및 독립운동활동
▶이후, 중국군 항일무장투쟁
- 중국협서 육군 제1사단 사령부 고문관 - 중국 건국군 연군상군 육군 군부사령부 군의처장 - 중국 제3.4사령부 사성연군 총사령부 발군 - 중국 사천 육군 제14보 20 살형부에서 활약
▶1942.7.26. 중국 사천성 성도에서 독립투쟁 중 서거
▶1977. 건국훈장 애국장
▶공적비(부여 군민체육공원, 백암초교 앞, 복지회관 앞)
非我(비아), 나의 모든 自我(자아)는 더 이상 내안이 아닌 구국에 있다"
▶1905. 을사조약으로 외교권 박탈 등 국가통치권 사실상 상실
▶1909. 부여 임천 향리에 천흥학교 설립, 미국으로부터 신한민보 들여와 발행,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구국 항일투쟁을 위한 의병계열 비밀결사 전개
▶1912. 고종의 밀칙을 받은 임병찬 등과 대한독립의군부 조직 및 군자금 모집 조달하던 중
▶1914.5. 일본경찰에 피검(총54명), 인천형무소 1년 여 옥고
▶1917. 출소 후 일제의 감시로 국내항일운동 한계, 중국으로 망명
▶1919.4.13. 상해임시정부 수립,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활동
▶1922.9. 상해 한중호조사 이사회개최 외무부 교제과 간사로 참석, 한중 외교 및 독립운동활동
▶이후, 중국군 항일무장투쟁
- 중국협서 육군 제1사단 사령부 고문관 - 중국 건국군 연군상군 육군 군부사령부 군의처장 - 중국 제3.4사령부 사성연군 총사령부 발군 - 중국 사천 육군 제14보 20 살형부에서 활약
▶1942.7.26. 중국 사천성 성도에서 독립투쟁 중 서거
▶1977. 건국훈장 애국장
▶공적비(부여 군민체육공원, 백암초교 앞, 복지회관 앞)
愛國志士 非我 豐壤趙公 重九 之墓(애국지사 비아 풍양조공 중구 지묘)
愛國志士 非我 豐壤趙公 重九 之墓
(애국지사 비아 풍양조공 중구 지묘)
(애국지사 비아 풍양조공 중구 지묘)
공의 성은 조씨요, 휘는 중구, 자는 雲雷(운뢰), 호는 非我(비아)이니 풍양인이다. 上祖(상조)의 휘는 孟(맹)이니 고려 開國功臣(개국공신) 門下侍中(문하시중) 平章事(평장사)요, 공의 18대조는 휘 愼(신)으로 려말에 淮陽都護府使(회양도호부사)로서 고려가 衰(쇠)하자 관직을 버리고 의를 지켜 덕림에 은둔하였으니 후에 사림들이 동곡서원을 세우고 제향하고 있다. 공의 15대조는 휘 益禧(익희)로 사헌부 감찰이요. 12대조는 휘 應祿(응록)이요. 호 竹溪(죽계)로 兵曹正郞(병조정랑)이고 11대조는 휘 邦直(방직)이요, 호 脩竹(수죽)으로 全州府尹(전주부윤)이니 죽계공과 수죽공은 낙공과 함께 朗山祠(낭산사)에 배향을 하고 있다. 조의 휘는 配夏(배하)요, 부의 휘는 동식이며, 비는 전주이씨로 芝湖選(지호선)의 후예다. 공은 서기 1880년 1월 4일 세도 면장리에서 7남매 중 장자로 출생하였으며 배는 하동정씨이니 一蠹汝昌(일두여창)의 후
공의 성은 조씨요, 휘는 중구, 자는 雲雷(운뢰), 호는 非我(비아)이니 풍양인이다. 上祖(상조)의 휘는 孟(맹)이니 고려 開國功臣(개국공신) 門下侍中(문하시중) 平章事(평장사)요, 공의 18대조는 휘 愼(신)으로 려말에 淮陽都護府使(회양도호부사)로서 고려가 衰(쇠)하자 관직을 버리고 의를 지켜 덕림에 은둔하였으니 후에 사림들이 동곡서원을 세우고 제향하고 있다. 공의 15대조는 휘 益禧(익희)로 사헌부 감찰이요. 12대조는 휘 應祿(응록)이요. 호 竹溪(죽계)로 兵曹正郞(병조정랑)이고 11대조는 휘 邦直(방직)이요, 호 脩竹(수죽)으로 全州府尹(전주부윤)이니 죽계공과 수죽공은 낙공과 함께 朗山祠(낭산사)에 배향을 하고 있다. 조의 휘는 配夏(배하)요, 부의 휘는 동식이며, 비는 전주이씨로 芝湖選(지호선)의 후예다. 공은 서기 1880년 1월 4일 세도 면장리에서 7남매 중 장자로 출생하였으며 배는 하동정씨이니 一蠹汝昌(일두여창)의 후
손이다. 생(生) 1남 2녀하니, 자남(子男)은 남일(南一)이요 손남은 녕연 강연 재연이다. 서(婿)는 문화 유인동 순흥 안병선이요 외손은 유홍열 호열 상열 계열 안충헌이다. 공은 소시부터 성도(性度)가 준정(峻定)하여 대의를 처결함에는 학연히 자수(自守)하고 의연히 불요(不撓)하였다. 한일합방이 되자 공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서기 1909년부터 임천에 천흥학교를 설립하고 학감으로 투신 민족의 자주력을 교육하면서 중군 망명투사와 접선 구국운동자금을 공여하고 국내동지 규합에 활약하다가 서기 1914년에는 왜경에게 피검되어 인천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익년에 출감하였다. 왜경의 감시가 극심하여 학교운영은 물론 국내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서기 1919년 중국에 망명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동지들과 동함하며 외무성 및 초대 의원직으로 활약하다 서기 1922년 임시정부 4년에 자금난 등으로 사임하였으며 중국 협서 육군 제1사단 사령부 고등고문관으로 활약하였다. 그 후 중국 건국군 상군 제6군사령부 의처장 겸 제3사단 사령부 등의 및 사성연군 총사령부 등군으로 조국광복의 항일투쟁에 투신하였다. 공의 공적은 무수히 많을 것이나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동지들은 타계하고 골자(骨子)있는 문서나 왕래 서신은 일제의 형별이 두려워 소각 또는 오랜 세월에 기손(棄損) 되었음으로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사실만을 기술하니 애석하기 그지없다. 공은 서기 1942년 7월 26일에 조국의 광복을 목전에 둔채 망국의 한을 품고 이국만리인 중국 사천성도 남항 227호에서 파란많은 일생을 마치니 향년 63세였다. 대한민구 정부에서는 공의 공적을 기려 서기 1977년 12월 13일에 제799호로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공의 평생을 세속적인 이해득실이나 사생영욕에는 일부동심하였으니 그 청백한 심성과 숭고한 충의정신은 세인의 추중(推重)하는 바가 되었으며 공의 구국행적은 만인의 앙시(仰視)를 받음이 당연한 고로 이곳에 감히 명을 지어 영세에 전하고자 한다.
서기 1984년 갑자(甲子) 8월 일
서기 1984년 갑자(甲子) 8월 일
손이다. 생(生) 1남 2녀하니, 자남(子男)은 남일(南一)이요 손남은 녕연 강연 재연이다. 서(婿)는 문화 유인동 순흥 안병선이요 외손은 유홍열 호열 상열 계열 안충헌이다. 공은 소시부터 성도(性度)가 준정(峻定)하여 대의를 처결함에는 학연히 자수(自守)하고 의연히 불요(不撓)하였다. 한일합방이 되자 공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서기 1909년부터 임천에 천흥학교를 설립하고 학감으로 투신 민족의 자주력을 교육하면서 중군 망명투사와 접선 구국운동자금을 공여하고 국내동지 규합에 활약하다가 서기 1914년에는 왜경에게 피검되어 인천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익년에 출감하였다. 왜경의 감시가 극심하여 학교운영은 물론 국내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서기 1919년 중국에 망명하여 임시정부 수립에 동지들과 동함하며 외무성 및 초대 의원직으로 활약하다 서기 1922년 임시정부 4년에 자금난 등으로 사임하였으며 중국 협서 육군 제1사단 사령부 고등고문관으로 활약하였다. 그 후 중국 건국군 상군 제6군사령부 의처장 겸 제3사단 사령부 등의 및 사성연군 총사령부 등군으로 조국광복의 항일투쟁에 투신하였다. 공의 공적은 무수히 많을 것이나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동지들은 타계하고 골자(骨子)있는 문서나 왕래 서신은 일제의 형별이 두려워 소각 또는 오랜 세월에 기손(棄損) 되었음으로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사실만을 기술하니 애석하기 그지없다. 공은 서기 1942년 7월 26일에 조국의 광복을 목전에 둔채 망국의 한을 품고 이국만리인 중국 사천성도 남항 227호에서 파란많은 일생을 마치니 향년 63세였다. 대한민구 정부에서는 공의 공적을 기려 서기 1977년 12월 13일에 제799호로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공의 평생을 세속적인 이해득실이나 사생영욕에는 일부동심하였으니 그 청백한 심성과 숭고한 충의정신은 세인의 추중(推重)하는 바가 되었으며 공의 구국행적은 만인의 앙시(仰視)를 받음이 당연한 고로 이곳에 감히 명을 지어 영세에 전하고자 한다.
서기 1984년 갑자(甲子) 8월 일
서기 1984년 갑자(甲子) 8월 일
족질 남택 근찬
능성 구강회 근서
손 영연 재연 근립
능성 구강회 근서
손 영연 재연 근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