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철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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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611-2
탐방로그
부여군 차원에서 조성 사업에 힘쓰고 있는 남령근린공원에 있다. 남령근린공원에 최운선의 시비, 충의사, 의열사, 부여향교 등등을 모두 만나 볼 수 있다. 남령근린공원 북쪽에 위치한 흑천로에서 석탑로남령길 방면으로 정상에 오르는 길 양옆으로 언덕길 있다. 이 곳에 15기의 비석이 모여있는데 그 중에 독립유공자의 기념비들만 모아 사진으로 정리하였다. 유기섭 기적비, 이호철 선생 기념비, 이희춘의 조선독립만세비 등을 함께 볼 수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611-2 남영공원입구. 청소년수련원 뒤에 있는 산이다.
애국지사 원인 이호철선생 기념비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일생을 숭고하게 바친 원인 이호철선생의 애국총의는 길이 천추에 빛나 후손의 귀감이 되리라. 선생의 관은 서천이시니 동백 이병승선생의 삼남으로 서기 1901년 10월 29일에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토정리에서 출생하였다. 지혜총명이 과인하고 천성이 외유내강하여 유시로부터 학업에 정려한 발군의 수재로서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일본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일찌기 고등보통학교시부터 국치와 민욕의 원한이 가슴에 사무쳐 기미3.1운동 분연히 민족의 선두에서 독립을 절규저항하다가 피체되어 인욕을 당하였으며 서기 1923년에는 대학생의 신분으로 재일동포들을 규합하여 한인협화회를 조직 맹활약을 하였고 일본대학생들에게까지 대한독립의 정당성을 주장 설득하여 감복케하였다. 동년 9월 일본 관동지진시에는 천인공노할 한국인 무차별 대학살사건으로부터 구사일생으로 생환 천신만고끝에 북간도로 향하여 만주 성동중학교에서 일시교편을 잡으면서 재만 동포들에게 항일독립사상을 열렬히 호소, 고취하였다. 서기 1930년 일제항거에 일사를 각오하고 다시 귀향하여 동
지인 노명우, 강일 오기영, 서진정, 유기섭, 조병철 제항이투사와 모의하여 당시 민족지인 중앙일보사의 지국을 부여에서 개설하여 왜정을 통렬히 비판하며 지방인사 청년들에게 민족사상의 계몽선도에 전력을 다하였으며 동시에 항일 독립단체인 신간회 부여군지부와 금강문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중 서기 1933년 8월 10일에 체포되어 공주형무소에서 모진 옥고를 치뤘다. 선생께서는 삼엄??한 왜경의 감시하에서도 태산의 반석과 같이 자약무득 때로는 덕숭산수덕사에 입산수도하였고 또한 대종교를 신봉하여 단군성조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의 철학적 연구와 민족정기 고양에 전력하였다. 왜정의 악독한 고문과 백방의 회유는 선생으로 하여금 더욱 설한송죽의 위국단심을 굳게하였으며 세업으로 이어받은 전재산은 독립항일투쟁을 위하여 귀중하게 승화시켰다. 서기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조국의 해방은 왔다. 그토록 바랐던 조국광복이 선생의 안전에 전개한것이다. 이날을 보기위하여 고쥐한 벽혈을 조국에 바친 순국선열앞에 고개를 숙였고 또한 형극으로 이어진 자신의 행로가 무위가 아니었음에 보람을느꼈다. 이로부터 선생께서는 조국의 완전독립을 위하여 정치활동에 몰두하였으며 홍익대학에서 상의도 하였고 초대 충청남도 의회의원에 피선된바도 있었으나 매사 여의치못함을 통탄하고 야인으로 물러앉은 후로는 오로지 우국새정으로 나라의 강성과 후생의 애국정신 함양에 몸과 마음을 바쳤다. 선생께서는 일찍부터 민본주의, 사민평등을 주장하여 몸소 실천하였으며 문학, 철학, 사학, 종교, 정치, 경제의 각분야에 ?학하였고 특히 추심추물양론에 깊은 연구를 가하여 배달정신의 바탕위에 심체물용의 원리를 세워 대한민족의 활로를 찾았으며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