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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1001
- 탐방로그
-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1001 애국지사마을 표지석을 찾았다. 노재철 선생과 노명우(盧命愚) 선생, 노명우(盧明愚) 선생의 표지석을 찾을 수 있었다. 가까운 송당공원 숲 속에 있었던 두 분의 기적비도 이곳으로 이전되어 있었다. 애국지사마을 표지석 (규암면 합송리)는 버스합송정류소 맞은편에 위치해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교하노씨 공숙공파 부여종친 영모재
애국지사 마을
애국지사 마을
2020.9.23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민선7기 부여군수
2020.9.23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민선7기 부여군수
성명 : 노재철(盧載喆, 남, 1889.11.21)
본적 : 충남 부여군 규암면 노화리 498
운동계열 : 국내항일
1920년 1월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김좌진(金佐鎭)의 밀명을 띠고 입국한 김영진(金瑛鎭)과 협력, 충남 및 전북 등지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수천원의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경리국 경고문, 유고(諭告) 등의 격문을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체포되어 1922년 9월 1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9년형을 받고 1927년 2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는 향리에서 사숙(私塾)을 운영하면서 청장년의 정신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본적 : 충남 부여군 규암면 노화리 498
운동계열 : 국내항일
1920년 1월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김좌진(金佐鎭)의 밀명을 띠고 입국한 김영진(金瑛鎭)과 협력, 충남 및 전북 등지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수천원의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경리국 경고문, 유고(諭告) 등의 격문을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체포되어 1922년 9월 1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9년형을 받고 1927년 2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는 향리에서 사숙(私塾)을 운영하면서 청장년의 정신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성명 : 노명우(盧明愚, 남, 1897.08.05)
본적 :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354
운동계열 : 국내항일
영명학교에 재학중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주시장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1931년 고향에서 금강문인회를 조직하고 농민을 대상으로 야학을 운영하면서 초등교육을 실시하여, 항일 도립의식 고취에 열정을 쏱았다. 그후 부여농민학원을 창설하고 농민청년회 농민조직을 조직하였고, 1933년 7월 부여농민조합연합회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를 조직하여 항일 농민운동에 힘썼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본적 :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354
운동계열 : 국내항일
영명학교에 재학중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주시장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고, 1931년 고향에서 금강문인회를 조직하고 농민을 대상으로 야학을 운영하면서 초등교육을 실시하여, 항일 도립의식 고취에 열정을 쏱았다. 그후 부여농민학원을 창설하고 농민청년회 농민조직을 조직하였고, 1933년 7월 부여농민조합연합회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를 조직하여 항일 농민운동에 힘썼으며,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성명 : 노명우(盧命愚, 남, 1897.08.05)
본적 :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496
운동계열 : 국내항일
1930년 3월 고향에서 금강문인회를 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폈다. 또한 마정리(馬井里)·합송리(蛤松里)·조현리(鳥峴里)·장하리(長蝦里)·중정리(中井里) 등의 각 부락에 야학을 개설하고 농민층 청소년들에게 한글·산술 등의 초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토론회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사상과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으며, 1933년 7월 부여농민조합연합회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를 조직하여 항일 농민운동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본적 :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496
운동계열 : 국내항일
1930년 3월 고향에서 금강문인회를 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폈다. 또한 마정리(馬井里)·합송리(蛤松里)·조현리(鳥峴里)·장하리(長蝦里)·중정리(中井里) 등의 각 부락에 야학을 개설하고 농민층 청소년들에게 한글·산술 등의 초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토론회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사상과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썼으며, 1933년 7월 부여농민조합연합회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를 조직하여 항일 농민운동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가까운 송당공원 숲 속에 있었던 두 분의 기적비도 이곳으로 이전되어 있었다.
故 雲圃 盧公 載喆 求國記跡碑
(고 운포 노공 재철 구국기적비)
(고 운포 노공 재철 구국기적비)
故 雲圃 盧公 載喆 求國記跡碑
(고 운포 노공 재철 구국기적비)
충남 부여(扶餘)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1920년 1월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김좌진(金佐鎭)의 밀명을 띠고 입국한 김영진(金瑛鎭)과 협력, 조속한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서 동지 조병채(趙炳彩) 등과 상의하고 충청남도 및 전라북도 등지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수천원의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경리국 경고문, 유고(諭告) 등의 격문을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체포되어 1922년 9월 1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이란 죄명으로 징역 9년형을 받고 1927년 2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는 향리에서 사숙(私塾)을 운영하면서 청장년의 정신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고 운포 노공 재철 구국기적비)
충남 부여(扶餘)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1920년 1월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김좌진(金佐鎭)의 밀명을 띠고 입국한 김영진(金瑛鎭)과 협력, 조속한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서 동지 조병채(趙炳彩) 등과 상의하고 충청남도 및 전라북도 등지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수천원의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 경리국 경고문, 유고(諭告) 등의 격문을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체포되어 1922년 9월 1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이란 죄명으로 징역 9년형을 받고 1927년 2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는 향리에서 사숙(私塾)을 운영하면서 청장년의 정신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고 운포 노공 재철 구국기적기
공의 본관은 교하요 휘는 재철 자는 사안 호는 운포이다. 천은당 문광공 휘 사진의 17세손 전 4세 참봉 휘 망위의 11세 손 부사과 휘 성우의 차남으로서 서기 1889년 기축 11월 21일 부여군 규암면 노화리에서 출생하다. 천성이 온순하고 총명이 과인하며 승습가훈하고 일지기 우송 이유근 만송 박창규 양 선생의 문인으로 수학하여 숭유정신이 투철하고 삼강오륜 인의예지를 숭봉하는 단아한 사인으로 성장하다. 기일상조로서는 군사부일체인 비군불식이 요 비사부지요 비부부생이라는 논리관을 배양하여 오다가 경술국치 후 국권상실과 민족노예의 비분을 지극히 통탄하여 오매불망 중 기미 3.1운동이 발발 독립운동은 국내외에 파급되고 중국 상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여 기솔하 북로군군정서 군자금 모연운동을 전개하자 공은 자원 모연이 되여 당시 광복단 단장 한훈 광복군 충북대표 김영진 및 지방 동지 김형제 이준호 이창호 김백손 등 인사와 암암리에 상합국내각지에서 군자금을 모집 행각하다가 서기
공의 본관은 교하요 휘는 재철 자는 사안 호는 운포이다. 천은당 문광공 휘 사진의 17세손 전 4세 참봉 휘 망위의 11세 손 부사과 휘 성우의 차남으로서 서기 1889년 기축 11월 21일 부여군 규암면 노화리에서 출생하다. 천성이 온순하고 총명이 과인하며 승습가훈하고 일지기 우송 이유근 만송 박창규 양 선생의 문인으로 수학하여 숭유정신이 투철하고 삼강오륜 인의예지를 숭봉하는 단아한 사인으로 성장하다. 기일상조로서는 군사부일체인 비군불식이 요 비사부지요 비부부생이라는 논리관을 배양하여 오다가 경술국치 후 국권상실과 민족노예의 비분을 지극히 통탄하여 오매불망 중 기미 3.1운동이 발발 독립운동은 국내외에 파급되고 중국 상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여 기솔하 북로군군정서 군자금 모연운동을 전개하자 공은 자원 모연이 되여 당시 광복단 단장 한훈 광복군 충북대표 김영진 및 지방 동지 김형제 이준호 이창호 김백손 등 인사와 암암리에 상합국내각지에서 군자금을 모집 행각하다가 서기
1920년 3월 왜경에게 탄로 일제히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도 백절불굴 경사감내 특히 공은 당시 공주재판소 법정에서 판사에게 연석을 내던지며 항절하다가 형이 가중되어 함흥형무소에서 금고 9년의 독감방 장기 옥고를 치르고 출옥후에는 소위 요시찰인으로서 일절의 사생활 간섭 속에 지극한 강압을 받어가면서도 동지 명우공이 설립한 농민학원에서 자진 한문 교사로 빈곤 자제 교육에 봉사하다가 역시 왜경의 강압으로 단교되다. 기후 8.15 광복 후에는 민족단결의 국민운동을 주장하면서 임천면 점리 자택에서 사숙을 개설하고 빈곤자제에게 한문을 무료 교습시키다. 이때에 사손 승두가 천재적 총명으로서 미래의 동량지재임을 예측하고 기 교육에 전력을 경주하였으나 빈한한 가세에 학자 조달에 급급 초지를 불굴하고 지역인사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서울대학 법과를 수석으로 졸업시켰으나 후일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의 영예를 보지 못하고 서기 1957년 9월 28일 향년 69세를 일기로 귀천하다. 후사는 남 인호 여 조남준 김기인 유재광 손 승두 승곤 승원이다. 오호장재라. 공이 일찌기 쌓은 구국애족의 투지에 겸하여 투철한 교육열은 필설로 난형하겠다. 기후 혼을 진모하기 위하여 서기 1967년 부여 애국동지회 대표 강용구 이호철 서울 광복동지회 대표 김중화 등 인사들이 발기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입비사업을 추진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이분들이 작고 후 심체중 지역사회 교동지들이 재발기기 뜻을 이어 추진하여 이 비를 세워 후세에 전하노라.
서기 1975년 3월 1일 건립추진위원회 위원 이재헌 광주인 정창환 근찬 경주인 김일제 근서
서기 1975년 3월 1일 건립추진위원회 위원 이재헌 광주인 정창환 근찬 경주인 김일제 근서
故 一水 盧公 明愚 求國記跡碑
(고 일수 노공 명우 구국기적비)
(고 일수 노공 명우 구국기적비)
故 一水 盧公 明愚 求國記跡碑
(고 일수 노공 명우 구국기적비)
충남 부여(扶餘) 사람이다. 공주읍에 소재한 영명학교(永明學校)에 재학중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항일전단 천여매를 인쇄한 후 동지 유준석(柳俊錫)과 함께 각자 전단 백매씩을 휴대하고 4월 1일 공주시장에서 전단을 살포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들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혀 동년 8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조선일보·동아일보·중외일보·중앙일보 등에서 기자와 지국장을 지냈으며, 부여농민학원(扶餘農民學院)을 창설하고 이를 후원하기 위해 농민청년회(農民靑年會)·농민조합을 조직하였다. 1930년 3월에는 고향에서 19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금강문인회(錦江文人會)를 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폈다고 한다. 또한 1931년 봄에 이호철(李戶喆)·유기섭(柳基燮)·장창선(張昌善)·오기영(吳麒泳) 등과 함께 부여군 홍산면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항일독립운동을 펼 것을 목적으로 농민조합의 조직에 착수하였으나 일경의 취체가 심하여 중단하였다. 이들은 또한 동년 7월 청년들을 규합하여 부여농민조합연합회(扶餘農民組合聯合會)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大也俱樂部)를 조직하고 이의 확대강화에 힘쓰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붙잡힌 지 2년 만인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고 일수 노공 명우 구국기적비)
충남 부여(扶餘) 사람이다. 공주읍에 소재한 영명학교(永明學校)에 재학중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항일전단 천여매를 인쇄한 후 동지 유준석(柳俊錫)과 함께 각자 전단 백매씩을 휴대하고 4월 1일 공주시장에서 전단을 살포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군중들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혀 동년 8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조선일보·동아일보·중외일보·중앙일보 등에서 기자와 지국장을 지냈으며, 부여농민학원(扶餘農民學院)을 창설하고 이를 후원하기 위해 농민청년회(農民靑年會)·농민조합을 조직하였다. 1930년 3월에는 고향에서 19명의 동지들과 더불어 금강문인회(錦江文人會)를 조직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폈다고 한다. 또한 1931년 봄에 이호철(李戶喆)·유기섭(柳基燮)·장창선(張昌善)·오기영(吳麒泳) 등과 함께 부여군 홍산면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항일독립운동을 펼 것을 목적으로 농민조합의 조직에 착수하였으나 일경의 취체가 심하여 중단하였다. 이들은 또한 동년 7월 청년들을 규합하여 부여농민조합연합회(扶餘農民組合聯合會)의 지부로서 대야구락부(大也俱樂部)를 조직하고 이의 확대강화에 힘쓰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붙잡힌 지 2년 만인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고 일수 노공 명우 구국기적
공의 본관은 교하요 휘는 명우 자는 월성 호는 일수이다. 천은당 문광공 휘 사진의 16세손 전 사세 삼봉망위의 10세손 휘 병완의 장남으로서 서기 1900년 경자 윤 8월 5일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에서 출생하다. 위인이 총명 강직 비범 출중하더니 16세 시 공주영명학교에서 수학 중에는 망국의 한을 품고 학생 동지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는 일방 항일구국투쟁의 여성 대표적 인물인 유관순 양과 연락하여 기미 3.1운동이 봉기하자 공은 혈서로서 국권회복을 맹세하는 등 제1선에서 활약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8월에 처형 공주형무소에서 복역 중 신병으로 가출옥하였으니 이것이 세칭 영명학교 학생 18인 만세사건이다. 기후 배재고보에 입학 무산학생으로 조직된 고학생 "갈톱"에 입회 회장에 추대되어 독립운동에 앞장섯고 연희전문학교에 진학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나 왜경의 감시로 부득기 중퇴하고
공의 본관은 교하요 휘는 명우 자는 월성 호는 일수이다. 천은당 문광공 휘 사진의 16세손 전 사세 삼봉망위의 10세손 휘 병완의 장남으로서 서기 1900년 경자 윤 8월 5일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에서 출생하다. 위인이 총명 강직 비범 출중하더니 16세 시 공주영명학교에서 수학 중에는 망국의 한을 품고 학생 동지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는 일방 항일구국투쟁의 여성 대표적 인물인 유관순 양과 연락하여 기미 3.1운동이 봉기하자 공은 혈서로서 국권회복을 맹세하는 등 제1선에서 활약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8월에 처형 공주형무소에서 복역 중 신병으로 가출옥하였으니 이것이 세칭 영명학교 학생 18인 만세사건이다. 기후 배재고보에 입학 무산학생으로 조직된 고학생 "갈톱"에 입회 회장에 추대되어 독립운동에 앞장섯고 연희전문학교에 진학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나 왜경의 감시로 부득기 중퇴하고
지방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동안에 가세가 파탄 가족은 분산되여 부친은 만주로 떠나고 공은 모친과 같이 전북 익산에서 근근한 생활 속에서 삼광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부인의 내조를 얻어 사고무친이 된 유관순 양의 남제 관석을 교육시켰으니 가상하도다. 독립 순열의 가족을 위하여 어려운 환경에서 이 거룩한 처사야 말로 감탄불기하도다. 기후에는 교직을 사퇴하고 언론창달로서 민족의식 고취에 유의하여 조선일보 이리지국 동아일보 강경지국을 경영하였고 이어서 본사에 입사후에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왜경의 간섭으로 부득기 사퇴 하향하여 동지를 규합 금강문인회를 조직하고 규암면 합송리에 농민학원을 설립 빈곤 자제 교육에 힘쓰는 일방 민족사상을 주입시켰고 당시 거국적으로 펼치던 항일단체인 신간회 부여지부를 조직 계몽을 전개하여 어느 집회에서도 참여하여 산하를 진명하듯 기 강연이야말로 청중으로 하여금 희비 감명을 자유로 촉진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32세 시 7월에 왜경에게 검거되어 고문과 기아에 추호도 불굴하고 공주형무소에서 징역 4년의 형을 치루었으니 내 이것이 유기섭 이호철을 비롯한 세칭 부여 53인사건이다. 출옥 후 형독으로 와병 중 배재고보 동창인 이용설 박사의 주선으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기 정성어린 약석의 효과도 없이 1938년 4월 21일 조국광복 약 7년을 남겨놓고 조국독립의 원한을 품은 채 39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하여 천추의 원혼이 되였으니 오호애재라. 영구는 서울에서부터 왜경의 감시로 삼일 삼야를 걸려 상천도 통곡하듯이 보슬비 나리는 밤 9시 고향에 운구되였으나 왜경이 조객을 막아가며 일명전 매장하라는 가혹한 催促(최촉)으로 익일 새벽 향리 공동묘지에 치장하였다가 후일 향리 종산에 이장하다. 후사는 남 재필 여 이상덕 강동화 손 석호이다. 기후 1967년 공의 투철한 애국애족의 장지 의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부여 애국동지회 대표 강용구 이호철 서울 광복동지회 대표 김중화 등 인사들이 발기 기념사업회를 조직하고 입비사업을 추진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이 분들이 작고 후 침체 중 지역사회 교동지들이 재발기기 뜻을 이어 추진하여 이 비를 세워 후세에 전하노라.
서기 1975년 3월 1일
서기 1975년 3월 1일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이재헌
광주인 정창환 근찬
경주인 김일제 근서
광주인 정창환 근찬
경주인 김일제 근서
저곳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이전된 것이다.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1001 애국지사마을 표지석을 찾았다.
교하노씨 문중 표지석 옆에 건립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