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태양리 86-2
- 탐방로그
- 조병철 추모비는 부여군 구룡면 태양리 86-2 구룡면 행정복지센터 건너편에서 오른쪽으로 도보 1분 이내에 있다. 이용규 생가지비와 같은 장소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정부는 선생에게 서기 1982년 8월 15일자 조국수호의 유공을 기리고저 포상을 추서하였으며 만시지탄이나 겨레의 숙원으로 충남 부여군 구룡면 죽교리 전록 묘지 이 터 위에 선생의 얼을 기리고저 금석에 글을 새겨 비를 세우고 민족수난의 발자취를 더듬어 자주 불요불굴의 민족정신을 한 층 새롭게 하기 위하여 정성어린 추모비를 세워 숭앙의 뜻을 표하노라.
서기 1985년 4월 4일
부여군수 정경택 근수
여산후인 송기영 근서
서기 1985년 4월 4일
부여군수 정경택 근수
여산후인 송기영 근서
愛國志士 曺秉哲 先生 追慕碑(애국지사 조병철 선생 추모비)
조병철 선생 비문갈명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일생을 숭고하게 바친 선생의 애국충의는 천추에 빛나 후대의 귀감이 되리라. 시조 휘는 계룡이니 신라 진평왕 여서로 봉 창녕부원군하여 위관 어 창녕이시며 선생은 42대의 후예로 조기승 선생과 배 한산이씨 슬하에 장남으로 서기 1908년 2월 24일 충남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에서 출생하시다. 선생은 지혜총명이 과인하고 천성이 외유내강하며 유시부터 한학에 전심치지 사서삼경을 수학 정려한 발군의 수재로서 국치와 민욕의 원한이 가슴에 사무처 조국수호의 대의 앞에 분연이 일어선 고결한 애국지사로서 일신의 안위와 부귀공명을 부운시하고 왜적에 항거하다. 서기 1930년 1월 피체되어 잔악무도한 인욕을 당하였으며 친제 조병학과 이호철 노명우 류기섭 노명우 선생 등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일생을 숭고하게 바친 선생의 애국충의는 천추에 빛나 후대의 귀감이 되리라. 시조 휘는 계룡이니 신라 진평왕 여서로 봉 창녕부원군하여 위관 어 창녕이시며 선생은 42대의 후예로 조기승 선생과 배 한산이씨 슬하에 장남으로 서기 1908년 2월 24일 충남 부여군 홍산면 조현리에서 출생하시다. 선생은 지혜총명이 과인하고 천성이 외유내강하며 유시부터 한학에 전심치지 사서삼경을 수학 정려한 발군의 수재로서 국치와 민욕의 원한이 가슴에 사무처 조국수호의 대의 앞에 분연이 일어선 고결한 애국지사로서 일신의 안위와 부귀공명을 부운시하고 왜적에 항거하다. 서기 1930년 1월 피체되어 잔악무도한 인욕을 당하였으며 친제 조병학과 이호철 노명우 류기섭 노명우 선생 등
19인 항일투사가 단합하여 농민의 문맹퇴치를 빙자 각동리에 야학당을 개설하여 민족사상과 항일정신을 심으며 민족의 활약에 몰두. 항일단체인 신간회 부여군 지부의 금강문인회를 조직, 일명을 홍모와 같이 가볍게 생각하고 충남 부여군 부두리 평야 갈대밭에서 선생 외 4인 항일투사가 동양척식회사 다목농장 왜경 경찰서를 파괴 결의밀회가 탄로되어 호칭 충남 비사사건이란 명목으로 애국청년 백명도 일경에 피체되었으나 다수 동지는 석방되고 선생은 대전경찰부에 감금되어 극악고문에도 위국단심 불굴항거하다가 왜적의 비인도적 악형으로 선생의 열손가락 손톱과 열발가락 발톱을 펜촉으로 욱이고 집게로 뽑아 전무케 하였으며 선생은 기후 송국되어 공주형무소에 구검케하고 예심에 회부 서기 1936년 6월 만 3년 1개월의 옥고 끝에 5개년 집행유예로 출옥되었으나 우국충정으로 나라의 융성과 후생의 애국정신 함양에 전념하였으므로 예비검속은 항상 선생의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며 장렬한 충혼을 낱낱이 열거하기 어려우나 위공을 회고하고 추앙할수록 민족의 가슴은 비분하고 통절할 뿐이다. 유전 전재산은 독립항쟁에 귀중하게 승화되었으나 서기 1945년 8월 15일 그토록 바라던 조국광복이 선생의 안전에 전개한 것이다. 그날을 보기 위하여 고귀한 벽혈을 조국에 바친 순국 선열 앞에 고개를 숙였으며 또한 이어진 자신의 행로가 무위가 아니였음을 보람으로 여기고 서기 1950년 5월 5일 향년 42세를 일기로 귀천하시니 조국 통일을 보지 못함이 한이었다. 선열들은 반드시 조국의 번영과 통일을 조감하시리라. 미망인 광산 김영매 여사는 선생과 결혼하여 독립운동 비밀지하 활동 연락에 적극 내조하였으므로 왜경의 협박과 위협으로 정신마저 혼미하고 청각마저 상실 고생하시며 극빈가정에서 형독으로 고생하는 선생에게 타에 지표가 될 부덕을 쌓았으며 애국지사의 열부에 정도를 다하고 서기 1970년 8월 28일 귀천하셨다. 선생과 김여사의 자주민의 강의와 민족정신을 만방에 과시한 충절은 겨레의 생명과 함께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