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규 생가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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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부여군 구룡면 태양리 86-2
탐방로그
국민포장 애국지사 이용규공 생가지비는 부여군 구룡면 태양리 86-2 구룡면 행정복지센터 건너편에서 오른쪽으로 도보로 1분 이내에 있다. 조병철 선생 추모비도 같은 장소에서 찾을 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서기 1988년 6월 일 부여군수 이병오 근수
國民褒章 愛國志士 李容珪公 生家址碑(국민포장 애국지사 이용규공 생가지비)
애국지사 이용규공 생가지비 이전기
공의 구국진명의 애국정신을 선양 추모하는 비가 뒤늦게 1988년 6월에 해지 구룡면 죽절리 입구 산록에 근수되였으나 일천한 현재에도 석조물의 퇴락 등 항구적인 보존 관리가 심히 우려되여 당국에 건의한 바 소요 시설비를 보조하여 주시여 이 곳 면내 선양비 집단정화지역에 이전케 되였다. 우리 모두는 공의 위대하신 충절을 영세숭모할지어다.
서기 1995년 3월 이용규공 생가지비 이전 구룡면추진위원회
공과 비 안동권씨의 장자로 출생하시었다. 9세에 자친을 여이었으나 그 효행과 학구가 출중하여 일취월장 OO
의 선각으로 부상하시더니 과연 을사위약이 늑체되여 국운이 누란에 빠저들으매 익 1906년 5월부터는 전
주 진안 용담 장수 무주를 돌아 서천 남포 오천으로 창의 모병하시니 4월에는 기세 3백을 헤아리게 되었다. 당
년에 공은 이미 초로 47세가 되었으나 매부 민종식을 의병장으로 하는 의병에 합류하였다. 4월 19일 내소
지치에서 대거하여 서천 구병동에 진군하니 군세는 1천 수백에 달했으며 비인 판교 남포에 이르러서는 2천을 규합하고 결성 황천을 거처 26일에는 홍주성을 함락시켰다. 이래 12일간 수성에 선전하였으나 윤 4월 9일 성을 다시 실함하자 공은 수하를 해산하고 일단 구룡 향제로 돌아와 잠시 머물렀으나 오호라 이것이 처자와의 마지막 해후일 줄 뉘 알았으랴. 공은 6월 청양 추치에서 4백의 정병을 모아 노성 연산으로 나가 일군과 싸우다가 처남 조병두가 피격 살해되었다. 동월 17일 적은 죽절리 본가로 대들어 독자 성문을 타살하니 미구에 부인 박씨도 순절하시었다. 공은 그 청을 모른채 온양 공주를 거처 예산 한곡에서 족형 이남규 공과 재기코저 하였으나 일진회의 밀고로 피집되어 익 1907년 2월 평리원 판결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6월에 감 일등하여 지도로 유배되시고는 11월에야 특사로 풀리었다. 1908년 4월 한성일보 사건으로 법정에 끌려간 일이 있었는데 9월에야 전문으로 부인이 자진하였음을 알았다. 공은 더욱 굳세게 항왜기의코저 하였으나 역불급을 개탄하던 중 경술국치를 당하였으니 1912년 2월 옥천으로 의사들이 모여 제고를 드린 후에 집산을 거듭하다가 기미만세운동에 몸소 가담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당년 각도대표를 연계하여 한성정부를 수립하기에 주력하였으며 즉후에는 상해임시정부에 대표를 급파하여 내국의 계통을 계승케 하였으니 장하도다. 배달국 반만년의 법통은 이로써 망명 정부에 이어지게 되었다. 이일로 동년 10월 공은 다시 수감되어 6개월의 실형을 당하였는데 기후 언제 출옥하였는지 어떻게 서거하였는지도 알 수 없어 여기 생가지에 유허비를 근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