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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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51
탐방로그
본 묘는 원래 1940년에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된 것을 1957년에 장군의 선산으로 옮긴 것이다. 김좌진의 봉분 위에는 김좌진의 부모의 묘가 함께 안장되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장군의 묘는 부모 묘소 앞에 봉분이 있고, 앞에는 장명등 외에 두 마리의 석마가 있다.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김좌진 장군 묘
백야 김좌진 장군은 서기 1889년(단기 2222년) 음력 11월 24일 충남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 김형균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시었으니 그 선은 안동이시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힘이 세었으며 17세때에 벌써 인간의 존엄성을 깨달으시어 문중의 노복들을 속량시켰고 삼천석 추수하던 전답을 소작인들에게 누상분배하여 사회개혁에 솔선수범하시었으며 한국무관학교를 졸업하고서 결수(1910년)국치를 당한후 수십간 되는 자기깁을 제공하여 호명학교를 설립하였고, 광복단사건에 연좌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른뒤 순국한 박상진의사의 뒤를 이어 광복단 단장에 취임하여 활약하다가 왜적의 체포령을 피해서 만주땅으로 망명한후, 길림성 일대를 근거지로 조국광복운동을 전개하며 기미독립선언서의 전신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를 여준, 이동녕, 허혁등 39인의 동지들과 함께 서명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장군이 31세되는 기미년 가을에는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총사령이 되어 왕청현 서대파에 사관양성소를 설치하고 독립군 간부 수백명을 양성하며, 경신 1920년에는 다량의 무기와 군자금을 확보하는 동시 참모에 나종소, 이범석장군등 탁월한 전략가로 상부를 조직하고 사관생400명을 기간으로하여 임전태세를 갖추었던바 이때 일본은 이를 탐지하고서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19사단관라남에 있넌 20사단에 명하여 장군의 북로군정서를 협공케 하였다. 때는 1920년 10월중순이었는데 장군은 청산리 백운평과 천수평사이에 독립군을 매복하고서 10월 19일부터 22일 사이에 불과 1800명의 병력으로 신출귀몰하게 작전하여 10배가 넘는 일본군을 전멸시켰으니 이것이 청산리전투였다. 이같이 큰 승리를 거둔후 식량과 탄환의 부족으로 인하여 장군은 밀산으로 잠시 후퇴하였다가 분산된 무장단체를 통합해 가지고 러시아땅으로 입경하여 그곳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려 하던중 임술년 여름에 흑하참변을 당한후 다시 만주로 넘어가 그해 즉 1922년부터 대한독립군단을 재조직하여 총사령이 되고 아직 노령에 있는 이청천잔군과 홍범도장군을 남만군사책임자에 최진동장군을 동만군사책임자에 각각 임명하는 일방 만주에 있는 혁명민중을 기반으로 신민부를 창설하고 군관학교를 세워 500명의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백두산 북녘기슭 삼림지대에 둔전제를 실시하여 국내 진격작전을 위한
준비를 서두르는 동시 지역단위의 농민협회를 통합케하여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장군이 주석이 되었으니 장군은 탁월한 전략가일뿐 아니라 정치, 경제, 교육 등 각 분야에 걸쳐서 뛰어난 경륜을 발휘하던 위대한 애국투사요 민족의 횃불이요 조국광복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분하고 슬프다. 기사년 즉 1929년 음력 12월 25일 오후 2시 북만주 영안현 산시에서 고려공산당청년회 악한의 흉탄을 맞고 쓰러져 마침내 41세를 일기로 조국광복의 뜻을 이루지 못한채 이세상을 떠나시었다. 장군이 세상을 떠나시자 부인 오씨는 1940년 9월 삼엄한 일본군의 경계망을 피하여 유골을 모시고 남하하여 장군의 출생지인 충남 홍성군 갈산에 가매장하였다가 1957년 음력 1월 13일 부인 오씨가 별세하자 이 곳에 이장 합폄하였고, 1971년 9월 보령군에서 장군과 묘를 중수하고 이 비석을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서기 1971년 9월 일 글 팔봉 김기진 글씨 일중 김충현
김좌진 장군의 봉분 위에 있는 부모의 묘. 안동김공 휘 형규진사, 배 유인 한산이씨 지묘
앞 김좌진장군의 묘비에는 부친의 이름이 김형균으로, 이곳 부친의 묘에는 김형규로 되어있다.
부친의 원래 성함은 김형균이었으나 갑신정변때 개명했다.
장군의 묘 앞에 있는 소나무는, 묘하게도 장군의 묘를 향해 절을 하는 것처럼 구부러져 있다.
이곳은 장군의 생가가 있는 충남 홍성군과 보령시의 경계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김좌진 장군 묘를 탐방하기 위해서 보령시로 넘어왔다.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51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백야김좌진장군 묘

1930년 일제의 사주를 받은 공산당원의 총에 맞아 순절한 장군의 유해는 만주땅에 임시 암매장되었다가
1940년 장군의 부인이 유해를 몰래 숨겨들어와 장군의 생가 인근인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하였다.
1957년 부인이 세상을 떠난 후 선산인 지금의 장소로 이장하였다.

이곳은 장군의 생가가 있는 충남 홍성군과 보령시의 경계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김좌진 장군 묘(金佐鎭 將軍 墓)
김좌진(1889〜1930)장군의 무덤으로 원래 1940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된 것을 1957년에 장군의 선산(先山)으로 옮긴 것이다. 장군의 호(號)는 백야(伯冶)이며, 갈산면 백야로 506번길(행산리)에서 태어났다. 18세에 호명학교(湖明學校) 세워 새로운 학문을 교육하였고, 1916년 광복단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3년간 옥고를 겪었다. 1919년 3 ·1 독립운동 후 만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총사령관으로, 1920년 일본군을 맞아 청산리전투에서 3,000여 명의 일본군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1925년 김혁(金赫)과 신민부(新民府) 조직하여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으며, 1930년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주석(主席)에 취암하여 재 만주 동포의 교육과 민생문제에 주력하였다. 한편 중국의 함일 세력과 함께 연합전선을 결성하고 대일 항전을 준비하던 중 1930년 1월 공산당 청년 당원에게 암살 당하였다. 1962년 3월 1 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을 받았다.
충의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