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제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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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죽청리 810-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獨立志士(독립지사) 金光濟(김광제)의 事蹟(사적)
선생은 서기 1881년 3월 6일, 충남 보령군 주산면에서 출생하셨다. 휘는 정제, 자는 성흠이요. 호는 운파이시다. 선계는 조선조의 세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지내시고, 보좌명 원종공신에 책록되셨던 휘 한, 호 우제공의 15대손 휘 상우, 자 인보, 호 기천이신 성균관 박사의 장자이시다. 일제에 의하여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니 선생은 독립운동의 큰 뜻을 품고 김동삼 등이 만주 류하현에 설치한 백서농장과 신흥무관학교에서 총무로 활동하셨으며, 1920년에는 서간도 교포 자치 조직인 한족회의 상무사장과 독립군부대 서로군정서 내무사 실업과장도 맡으셨다. 1922년에는 서일, 김좌진 등이 조직한 대한독립 군정서의 국내 공작에 가담하시어 강철구 등과 함께 서울과 부여 등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 공채를 갖고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시다가 일제 관헌에게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르셨다. 1925년 선생은 다시 간도로 건너가 이탁, 김동삼, 이청천 등을 중심으로 한 정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여 생계분과위원을 맡으시고 유한농업공사를 조직, 중앙집행위원이 되시어 정의부를 이끄셨다. 1927년에 김동삼 등과 함께 농민호조사를 조직하여 동포들의 생활 안정을 위하여 노력하는 등 나라를 찾기 위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시다가 1947년 환국하시어 후학을 양성하시던 중, 1962년 7월 8일 향년 83세로 작고하셨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뜻을 기려,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서기 2011년 10월
獨立志士 慶州金公 耘坡 諱 廷濟 墓碑
(독립지사 광주김공 운파 정제 묘비)
공의 휘는 정제 자는 성흠이요 호는 운파이시다. 공은 서기 1881년 3월 6일에 충남 보령군 주산면 주야리에서 출생하니 선계는 신라에 왕공 장상이며 조선조에 휘 한 호 우재공이 통훈대부 보좌 원훈공신으로 단종 선위에 은거 남포하고 그 15대손 휘 상우 자 인보 호 기천께서 도덕문장이 겸비하여 관지 성균박사공의 장자이니 어려서부터 엄친께 학덕을 전수받어 인격을 도야하시고 세태 파악에 남달리 현철명민하시였다. 공은 한말 국운이 쇠퇴하여 우국충정을 금할 수 없던 바 끝내 일제의 마수는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니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독립운동의 큰 뜻을 세워 국내에서 암약하다가 기미 3.1독립만세 당시 계씨 휘 량제공이 주렴산 만세 선봉자로 모진 고문과 수형을 당하니 국내에서는 뜻을 펼 수 없다고 생각되어 계씨와 동행 암행으로 국경을 넘어 세찬 설적을 헤치며 북만주 일대는 물론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동지들과 독립운동에 앞장 서서 때로 공공회의 일원으로 교민들과 상접하며 정보 수집 전달에 역무하였고 다음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밀령을 받고 국내의 군자금 조달책으로 수차 왕래하다가 서기 1922년 10월 동지 부여 은산 출신 박길화 김동진 및 문장섭 문경섭 등과 왜헌에 피체되여 심한 고문 끝에 보안법 위반 죄목으로 3년 언도를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함흥감옥으로 이감되어 형자의 악전 고투 긑에 서기 1925년 10월에 출옥하여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싸늘한 고향을 잊은채 또다시 북만주로 밀경하여 옛 동지들과 힘을 합하여 독립운동 대열에 참여 왜놈들과 싸우다 꿈에도 그리고 외치던 감격의 조국광복과 더부러 계씨 량제공과 작별하고 환국하시었으나 연세 연만하시여 일절의 타 공직을 사양하시고 탁월한 인품과 학덕을 후진양성에 진력하시다. 그 거룩한 뜻을 펴시지 못
하시고 오호라. 서기 1962년 7월 8일 83수를 일기로 기세하시였다.
서기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 포장령 제 12조 2에 의하여 대통령 표창 수상
서기 1990년 12월 26일 대한민국 헌법 규정에 의하여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대천 문화원장 파평 윤원석 근찬 남포향교 전교 족질 정원 근서
서기 1992년 임신 5월 10일 립
표창장 - 김정제
이 분은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독립운동에 이바지한바 많으므로 포장령 제 12조 2에 의하여 표창장을 증여하여 길이 표창함
1963년 3월 1일
대통령권한대행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내각사무처장 이석제
耘坡居士 慶州金公 諱 廷濟 之墓(운파거사 경주김공 휘 정제 지묘)
獨立志士 金廷濟 先生 崇慕碑(독립지사 김정제 선생 숭모비)
선생은 본관이 경주, 휘는 정제, 자는 성흠, 호는 운파이다. 신라 김씨 왕조의 후손으로 고려 예종조에 문과장원으로 검교태자 태사이신 선생의 25대조 휘 인관, 호 태사공을 중시조로 모신다. 16대조 휘 한, 호 우제공은 조선 세종조에 문과급제, 사헌부감찰을 지내시고 보좌명원종공신에 책록되셨는데 계유정난때 벼슬을 버리시고 남포에 은거하여 충절을 지키셨다. 조고 휘 광희, 호 정제공은 기호학파의 거유 숙재 조병덕의 촉망받는 제자로 학덕이 높으셨다. 부 휘 상우 자 인보, 호 기천공은 박람강기하여 문학에 뛰어나 성균관 박사를 지내셨다. 모는 평해 구씨 도정 병례공의 따님이시다. 선생은 서기 1881년 3월 6일 충남 보령시 주산면 주야리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셨다. 어려서는 충군효친의 가풍의 훈도를 받으며 전통적인 한학을 공부하셨다. 20대 청년기에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하고 국권이 찬탈되는 위기를 맞아 구국을 위한 혁신을 결단하시어 1906년 서울의 근대적 사립학교 돈명의숙에 입학하시어 1년간 수학하셨다. 1908년 2월 부터는 평북 구성군의 신민학교의 교원으로 구국계몽운동 일선에서 활동하셨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간도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셨다. 1910년대 중반 김동삼 등이 류하현에 설치한 백서농장과 신흥무관학교에서 총무로 활동하셨으며, 1920년에는 서간도 교포사회 자치조직 한족회의 상무사장과 독립군부대 서로군정서 내무사 실업과장의 책임도 맡으셨다. 1922년에는 서일, 김좌진 등이 조직한 대한독립군정서의 국내 활동에 가담하시어 서울과 부여 등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제 관헌에 체포되시어 1923년 3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이 선고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시다가 함경남도 함흥 형무소로 이감되셨다. 1926년에는 중 감옥에서 출옥한 선생은 다시 간도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셨다. 1925년 간도에서 이탁, 김동삼, 이청천 등을 중심으로 여러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한 정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여 생계분과 위원을 맡으시고 유한농업공사를 조직하셨다. 1926년에는 중앙집행위원이 되시어 정의부를 이끄셨다. 1927년에는 김동삼 등과 함께 농민호조사를 조직하여 교포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노력하셨다. 1930년대에는 가족들이 고향을 떠나 함흥을 거쳐 간도로 건너왔으나 선생께서는 가사를 돌볼 겨를이 없이 나라를 찾기위한 독립운동에 헌신하셨다. 광복이 된 후, 1947년 가족과 함께 귀향하시어 후학을 양성하시다가 1962년 7월 8일 향년 83세로 작고하셨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뜻을 기려 1963년 3월 1일 대한민국 표창령 제12조 2에 의하여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1990년 12월 26일 대한민국 헌법규정에 의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서기 2011년 6월 일
독립기념관 13대 독립운동사연구소장 경주 김기승 근찬
대천문화원장 임기석 근서(전면)
독립지사 김정제 선생 기념사업회장 김광환 근립
충남 보령시 웅천읍 죽청리 810-3 독립유공자 김정제의 묘를 찾았다.
서울 경기지역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명문가문 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