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대천리 179-42
- 탐방로그
- 2002년에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최상집의 업적을 발굴하였고, 2006년에도 이곳에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후세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할 말이 없는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의사의 빛나는 애국충정의 행적을 찾아 이 어덕 이 돌에 새겨 해와 달이 영원히 비추게 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고 길이 추모하게 되었음을 가문의 영광이요 이 고장의 자랑이요 민족 정기가 살아있음을 보이는 것이리라. 또한 당시 의사의 의병진이 분노의 함성을 울리며 지나갔던 이 언덕 이 길목에 비를 세워 지나는 이 모두가 의사의 충절을 추모하고 그 날의 역사를 되새기게 되었음은 더욱 뜻 깊은 이이라 할 것이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며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 비는 문중 유사 종진 종우와 유림 오현규등의 노력 그리고 문중과 후손의 성력으로 건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의사의 빛나는 애국충정의 행적을 찾아 이 어덕 이 돌에 새겨 해와 달이 영원히 비추게 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고 길이 추모하게 되었음을 가문의 영광이요 이 고장의 자랑이요 민족 정기가 살아있음을 보이는 것이리라. 또한 당시 의사의 의병진이 분노의 함성을 울리며 지나갔던 이 언덕 이 길목에 비를 세워 지나는 이 모두가 의사의 충절을 추모하고 그 날의 역사를 되새기게 되었음은 더욱 뜻 깊은 이이라 할 것이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며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 비는 문중 유사 종진 종우와 유림 오현규등의 노력 그리고 문중과 후손의 성력으로 건립하게 되었다.
홍주의병 9의사 남호 최상집 선생 추모비가 있다는 보령시 웅천읍 대천1리 향교말까지만 알고 찾아왔는데 역시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최상집의사 유적
최상집(1849~1909) 의사는 보령시 웅천읍 소황리 출신으로 본관이 강릉이고, 자는 중일 호는 남호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을 때, 1906년 민종식은 부여군 내산면 지티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산, 서천, 판교, 웅천, 남포, 보령, 광천, 결성을 걸쳐 홍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최상집 의사는 58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모집하는 소모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왜병의 반격으로 홍주성이 무너지면서 의사는 포로가 되어 유준근, 이식, 안항식, 신보균, 신현두, 이상구, 문석환, 남규진 등과 함께 대마도 유배형을 받고 끌려가 기약없는 기간의 고생을 하면서도 저들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절의를 기켰으니, 최상집 의사를 비롯한 이들을 '홍주의병 대마도 9의사'라고 한다. 의사는 몇번에 걸친 감형이 이루어져 3년만인 1908년 10월 석방되어 고국에 돌아왔으나, 의병운동의 후유증으로 병이 들어 이듬해인 1909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2년에 그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의사의 업적을 발굴하고 2006년에도 이곳에 추모비를 건립하고 부여군 외산면에 있는 의사의 묘소를 추모비 뒷편의 언덕에 옮겨 모셨다.
최상집(1849~1909) 의사는 보령시 웅천읍 소황리 출신으로 본관이 강릉이고, 자는 중일 호는 남호이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주권을 빼앗겼을 때, 1906년 민종식은 부여군 내산면 지티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산, 서천, 판교, 웅천, 남포, 보령, 광천, 결성을 걸쳐 홍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최상집 의사는 58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모집하는 소모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왜병의 반격으로 홍주성이 무너지면서 의사는 포로가 되어 유준근, 이식, 안항식, 신보균, 신현두, 이상구, 문석환, 남규진 등과 함께 대마도 유배형을 받고 끌려가 기약없는 기간의 고생을 하면서도 저들의 협박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고 절의를 기켰으니, 최상집 의사를 비롯한 이들을 '홍주의병 대마도 9의사'라고 한다. 의사는 몇번에 걸친 감형이 이루어져 3년만인 1908년 10월 석방되어 고국에 돌아왔으나, 의병운동의 후유증으로 병이 들어 이듬해인 1909년 6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2년에 그 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의사의 업적을 발굴하고 2006년에도 이곳에 추모비를 건립하고 부여군 외산면에 있는 의사의 묘소를 추모비 뒷편의 언덕에 옮겨 모셨다.
최상집의사는 본관이 강릉이고, 자는 중일 호는 남호이다. 의가의 가문은 그려 삼중대광 필달공이 시조이며 9대조 광필공이 문과에 급제하고 승지등을 역임하다가 최초로 남포현 황동 보령 웅천 소황리에 입향한 이래로 후손들이 400여년동안 이 고을의 명문향족을 이루면서 대대로 올바른 행실을 지켜왔다. 의사는 1849년(기유년) 아버지 규석과 어머니 전주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보령 웅천 소황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성이 바르고 엄하여 주변에서 많은 칭송이 있었으며 외세 침략의 격변기에 살면서 장릉 참봉을 역임하였고 유교의 춘추대의를 익혀 위정척사의 항일정신을 심화하면서 항상 국력이 쇠약해져 감을 탁식하였다. 1905년 일제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으니 이 나라의 백성 된 사람으로서 진실로 국가를 지키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한번 주걱믈 치고 소리라도 지르려는 행동이 없겠는가. 전 참판 민종식은 1906년(병오년) 1월 예산 광시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이어서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그 해 4월에 부여 내산 지티에서 의병을 일으켜 홍산 서천 판교 웅천 남포 보령 광천 결성을 거쳐 홍주서을 공격하여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으니 당시 우리나라 항일 의병 운동중 가장 뛰어난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이 두번에 걸친 민종식의병진에 의사는 58세의 노구를 이끌고 기꺼이 참여하여 의병을 모집하는 소모장으로 활약하였다. 많은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진의 세력을 확대하는 중요한 역할이었기에 세상에 명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왜병의 반격으로 홍주성이 무너지면서 의병장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피신하였지만 의사를 비롯한 140여명은 왜병의 포로가 되어 홍주에서 3일간 혹독한 심문을 받은후 그 가운데 의병활동의 중심에 섰던 78명은 다시 경성 일본군 사령부로 압송되어 2달간 투옥생활을 하면서 또다시 혹독한 심문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의사를 비롯한 유준근 이식 안항식 신보균 신현두 이상구 문석환 남규진등 9명의 의사들은 대모도 유배형을 받고 그 해 8월 대마도 이즈하라 경비대에 끌려가 낮선 이국땅에서 언제 고국에 돌아갈지 모르는 기약없는 기간의 고생을 하면서도 저들의 협박과 회유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절의를 지켰으니 이들은 "홍주의병 대마도 9의사"라고 한다. 특히 의사는 1년 전 아들을 잃은 슬픔과 9명의 의사중 58세의 최고령으로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더욱 컸겠지만 꿋꿋이 견뎌내었다. 얼마 후 면암 쵝익현도 대마도에 끌려와 함께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의사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74세의 최익현을 예를 갖추어 극진히 간호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는 상복을 입고 애도하였다. 그러다가 몇 번에 걸친 감형이 이루어져 3년만인 1908년 10월 석방되어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의사는 고령으로 체포된 후 왜병들의 혹독한 심문과 대마도 유배시 겪은 고통으로 몸이 쇠약해지고 병이 들어 고국에 돌아온 이듬해인 1909년(기유년) 12월 6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아니하고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항일의병운동에 뛰어든 의사의 충의와 대마도에서 끝까지 지킨 의사의 절의는 열렬하고 뚜렸하여 마땅히 세상에서 사모하는 바가 되어 비록 백대가 지난 뒤까지도 그 이름이 잊히지 아니하고 죽었어도 오히려 산 것과 같이 했어야 함에도 의사 사망후 100여년 동안 알지도 못하고 세상에 알리지도 못했으니 의사는 천하 후세에 할 말을 할 수 있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이 두번에 걸친 민종식의병진에 의사는 58세의 노구를 이끌고 기꺼이 참여하여 의병을 모집하는 소모장으로 활약하였다. 많은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진의 세력을 확대하는 중요한 역할이었기에 세상에 명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왜병의 반격으로 홍주성이 무너지면서 의병장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피신하였지만 의사를 비롯한 140여명은 왜병의 포로가 되어 홍주에서 3일간 혹독한 심문을 받은후 그 가운데 의병활동의 중심에 섰던 78명은 다시 경성 일본군 사령부로 압송되어 2달간 투옥생활을 하면서 또다시 혹독한 심문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의사를 비롯한 유준근 이식 안항식 신보균 신현두 이상구 문석환 남규진등 9명의 의사들은 대모도 유배형을 받고 그 해 8월 대마도 이즈하라 경비대에 끌려가 낮선 이국땅에서 언제 고국에 돌아갈지 모르는 기약없는 기간의 고생을 하면서도 저들의 협박과 회유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절의를 지켰으니 이들은 "홍주의병 대마도 9의사"라고 한다. 특히 의사는 1년 전 아들을 잃은 슬픔과 9명의 의사중 58세의 최고령으로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 더욱 컸겠지만 꿋꿋이 견뎌내었다. 얼마 후 면암 쵝익현도 대마도에 끌려와 함께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의사는 다른 동지들과 함께 74세의 최익현을 예를 갖추어 극진히 간호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는 상복을 입고 애도하였다. 그러다가 몇 번에 걸친 감형이 이루어져 3년만인 1908년 10월 석방되어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의사는 고령으로 체포된 후 왜병들의 혹독한 심문과 대마도 유배시 겪은 고통으로 몸이 쇠약해지고 병이 들어 고국에 돌아온 이듬해인 1909년(기유년) 12월 6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아니하고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구하기 위해 항일의병운동에 뛰어든 의사의 충의와 대마도에서 끝까지 지킨 의사의 절의는 열렬하고 뚜렸하여 마땅히 세상에서 사모하는 바가 되어 비록 백대가 지난 뒤까지도 그 이름이 잊히지 아니하고 죽었어도 오히려 산 것과 같이 했어야 함에도 의사 사망후 100여년 동안 알지도 못하고 세상에 알리지도 못했으니 의사는 천하 후세에 할 말을 할 수 있는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