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관형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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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산11-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보령시 웅천읍 구룡리 산 11-4 도로변의 독립운동가 백관형 선생 묘역 안내판
묘소 앞에는 묘비 대신에 기적비가 건립되어 있었다.
의사 옥재 백선생 기적비
충효열 3자는 긍만고에 불가마멸자야라. 고로 혹 유특행자하면 조가에서 포선하고 사림의 천양이 당연한 일이다. 보령군 남포면 양기리에서 철종 신유에 출생하신 옥재 백선생은 충효를 겸전하시였다. 선생의 휘는 관정이요 우 휘는 관진이며 호는 옥재이니 남포인이다. 현조는 이재 문헌공 휘 신정이요 사시 충정공 휘 완의 8대손이요 조 휘 사량은 호 희재이니 학문이 대저하고 고 휘는 동욱이요 비는 장흥임씨이다. 선생이 유시에 수재로 유명하여 류의암 인석과 최면암 익현 윤희당 석봉에게 수학하였다. 고위께서 국난을 우탄하여 세계대세를 주람하다가 소련 해삼위에서 별세하시니 선생이 도보로 만여리를 가서 유해를 운박하시어 선영하에 안장하였다. 경술국치 후로 만동묘 행사를 일인이 금지함애 선생이 항거 강행하다가 괴산왜경에 구류되어 50일간 단식투쟁 하시며 왜인도 금수는 않인데 예의를 모른다하고 호령하였다. 괴산왜경이 보령왜경에 이송하여 실신의 악형에도 굴복치 않하였다. 기미 3.1운동에 유림대표로 참석하시고 동시에 파리에서 세계평화회가 있어 곽면우 종석 김지산 복한 외 137인이 서명장서하고 고종황제 인산후에 융희황제가 능행하는
데 선생이 청량리 노상에서 소문을 올리고 구주하되 만민이 국망을 회복코저하여 만세소리가 국내에 진동하니 폐하께서도 만세를 동창하시여 시위하시라 하고 이승훈 최인 어대선 제공과 서명하여 재등총독에게 이서엄책하였다. 선생이 서대문감옥에 피인되어 고등법원에서 판결서에 지문을 찍으라 하니 선생이 대질하되 미등의 판결서가 대한국민이 하관이냐 하고 8일 단식함에 왜경이 강제로 욕식할새 장도로 개구하여 양협에 선혈이 임리하되 사색이 불변하니 왜경이 주사로 절명치 못
하게 하고 16개월 유수하였다. 선생은 일인이 시행하는 창씨개명 신사참배에도 불응하고 보령군 웅천면 수부리 자택에서 기미 9월 28일에 옹용히 서거하시니 춘추 69라. 묘소는 구룡리 예전산 11번지 선영하 축좌이요. 배위 경주김씨 부합조하다. 자는 홍균이니 문장으로 유명하고 손은 용학이니 이학에 밝고 증손은 영창이니 학사이다. 선생이 모진 악형에도 백절불굴의 투지는 과연 우국절사라 아니할 수 없다. 선생의 시문이 10여권이요. 명유와 서한 왕복이 100여장이요. 의암의 계지록과 희당의 아호기와 윤판서 석촌 용구의 액자문과 족손 창균의 사실기가 있다. 광복 후 무자 9월에 충남지사 이영진이 대천읍에서 백추강 낙관과 김지산 복한과 류우록 준근과 같이 모시고 추모제를 거행하는데 경향 관민회합이 3천여인이며 무술 7월에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시에 추모제를 거행하고 신해 5월에 군수 이원양의 주선으로 대천읍에 충의탑을 건립하고 계축 10월에 장충단의 파리장서 각명비가 있고 계해 8월에 전두환 대통령 포창장을 수하였으며 갑자 10월에 광복회 주선으로 정부특혜을 얻어 선생 묘정에 기적비를 세운다.
단군기원 4318년 을축 7월 일 밀양 박성철 근기 경주 김수열 근서
증손 영창
의사 옥재 백관형 선생 기적비 건립추진위원회 근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