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도항일의병 전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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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녹도리 292
탐방로그
2017년 당시 보령시장은 주권을 지키기 위해 항일 투쟁에 나선 의병들과 일본군에 협조하지 않고 의병 활동을 도운 주민들의 공훈을 기려 본 비를 건립하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녹도가는 배는 대천항을 출발해서 호도-녹도-외연도 순으로 가고, 돌아올때는 역순으로 해서 대천항으로 돌아온다
호도에 이어서 도착하는 녹도. 그런데 여객선터미널에 아무런 건물도 없다.
포구는 모래가 많은 항구여서 큰 배는 접안이 되지 않기 때문에 멀리 여객선터미널이 있었다.
마침 트럭을 운전하시는 분의 차를 얻어타고 포구로 갈 수 있었다.
녹도포구
녹도포구 옆에 항일의병전적비를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GPS상의 주소는 보령시 오천면 녹도리 292 인근이다.
鹿島 抗日 義兵 戰跡碑(녹도 항일 의병 전적비)
이곳 녹도는 주벅어업으로 예부터 풍요의 섬이었는데,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저항해 일어난 정미의병의 역사적 장소가 되었다. 1907년 8월 해산군인들이 주도한 의병이 봉기한 상황에서 보령의 이웃 고을인 홍주의 분견대가 봉기했고, 그들 중 4-5명이 오천을 통해 녹도에 들어와 도적으로부터 녹도의 풍요를 지키며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첫 투쟁으로 군산과 인천을 왕래하는 섬 주변 항로를 운행하는 일본 화물선을 공격하여 쌀과 소금을 빼앗아 주민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 사건 후 군산의 일본군 수비대 병력 10여 명이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녹도에 들어와 의병이 숨은 곳을 찾으려고 주민들을 가혹하게 조사하였다. 주민들은 보복과 고초의 위험을 무릅쓰고 협조하지 않았다. 이에 의병들은 포구에 매복하고 있다가 일본군의 배가 밤에 동풍에 밀려 해안으로 떠밀리자 1907년 9월 8일 포구의 「돌끝」과 「노랑바위」에 은신하여 사격을 가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여 일본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배를 침몰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의병들은 보복을 피해 주민들에게 섬을 떠날 것을 권고하고 주민들과 함께 섬을 떠났다. 그후 9월 14일 군산에서 의병 진압을 위해 일본군과 경찰이 들어와 이장과 남은 주민들에게 의병의 소재와 상황을 조사하려 했으나 협조하지 않자 이장을 살해하고 녹도를 초토화했다. 남은 사람들은 호도로 헤엄쳐 피신했는데 추격해 온 일본군에 의해 호도와 삽시도 당산이 화재의 피해를 입기도 했다. 초토화된 녹도의 주민들은 잠시 섬을 떠났으나 다시 돌아와 섬과 주벅망을 복구하고 평화롭고 풍요한 섬을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녹도에 항일 의병 활동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협조한 주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알려져 온 녹도의병 상황을 보령문화연구회에서 2016년 자료수집과 주민 증언을 바탕으로 그 전모를 파악하게 되었고, 일신의 안위를 구하지 않고 항일 투쟁에 나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의병과 국가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고초를 무릅쓰고 의병활동에 협조한 녹도 주민의 애국심을 잊지 말아야 하겠기에 여기에 그 사실을 새겨 세우게 되었다.

2017년 11월 일 보령문화연구회 지음 / 전면 글씨 임기석 씀 / 보령시장 김동일 세움
주벅그물
보령시 오천면 녹도리 녹도 포구에 건립된 녹도항일의병 전적비를 탐방하기 위해서 보령시 대천연안여객선터미널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