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순 추모비

4

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하대리 20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충남 공주시 계룡면 하대리 202 전주이씨 익안대군파 종가 앞 순국선열 이학순 선생 추모비를 찾았다.
전주이씨 익안대군 6대손 인의공파 효사재
이학순 선생은 완산에서 출생하여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면 한양촌에서 살았다.
순국선열 전주이공 학순 추모비
애국지사 이학순 추모회측에서 보내주신 자료에 의하면, 이학순 선생은 충남 공주 대장리(현, 공주시 계룡면 하대리)에서 태어나셨는데, 송상도의 '기려수필'을 근거로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가 작성되다 보니 출생지가 완산 출신으로 잘못 알려진 것이라고 한다.
또 이학순, 이내수부자의 민족운동(논문)의 자료로 같이 보내주셨다. 보훈청 안내표지판도 정정하여 세웠다고 한다
학순공은 태조 고황제의 3남 익안대군 방의의 17대손으로 자는 경실이요 호는 회천이다. 1843년 7월 7일 완산에서 출생하시고 공주 대장리(현 하대리)에 기거하시다. 연산의 대명산 아래 한양촌에 정착하셨다. 청렴강직한 선비로서 유림내 명망이 높았던 선생은 을사보호조약 체결 소식에 고종황제께 상소를 올려 일제의 야욕을 밝히고 불가함을 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세상에 할 일이 없다 하시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여 제자들에게 의를 밝혀 충과 역에 대해 엄정하고 분명하게 가르치셨다. 경술국치를 당함에「신민의 역을 다하지 못한 불충에 하늘을 바라볼 수 없다」하시고 칩거하셨으나 일제는 유림에 대한 선생의 영향력을 두려워하여 일 명치왕의 양노은사금을 주겠다 여러 차례 초청하고 찾아와 회유와 협박을 하였다. 이에「나는 대한제국의 신민으로 나라를 망하고 황제가 치욕을 당하였건만 일사보국의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하였으니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하거늘 원수가 무의로 주는 금전을 받을 수 없다」하시니 일제는 굴복시키고자 옥에 가두고 온갖 협박을 다하였다. 선생을 끝내 굴복시키지 못하자 선생의 두 아들과 손자 욱을 불러 대신 받을 것을 강요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였다. 특히 차남 래준이「내 머리와 네 임금의 머리를 바꾼
다면 가하나 내 어찌 나라와 조상을 욕되게 하겠는가」라고 답하자 선생의 면전에서 내준에게 더울 모진 혹형을 가했으나 굴하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그들을 크게 꾸짖고「충의를 위해 우리 부자가 다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느냐」하시고 시를 지어 절의를 보인 후 단정히 앉아 대학 중용을 암송하셨다. 엄동하 옥중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단식하기를 6일, 그 의기는 꺾이지 않았으나 연로하고 병이 깊어 잠시 병보석 연금에 처해지자 선생은「황제가 욕을 당하였으나 신하의 도를 다하지 못하고 쇠락하여 더 이상 보은의 기회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음을 한탄」하는 임종시와 우시를 남기고 음독자결 하시었다. 이 때가 1910년 음력 12월 7일 향년 68세였다. 선생은 제자들과 유림에 의해 사육신과 뜻을 같이 한 익안대군의 증손 옥계도정공과 함께 충곡서원에 배향되셨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고 1979년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 395호에 안장되셨다.
내수공의 자는 원백이요 호는 양은이다. 부친의 뜻을 이어받겠다 다짐하고 일제의 민적을 불사르기를 여러 차례 결국 구속되어 그 연유를 묻자「너희 국민이 되지 않으려 그리하였다」답하고 서울로 이송된 후 8일간 단식하셨다. 1916년 선생은 무장봉기 할것을 결의하고 고종황제께 고하니 황제는 좌찬성의 위를 제수하고 밀지와 마패, 인장을 시종관 전용규를 시켜 하사하셨다. 이에 선생은 공주 의병장 이용규, 이만직, 윤병일, 동생 내준 등과 함께 실행을 준비하였으나 누설되어 구속되셨다. 선생은「먼저 5흉 7적을 참하고 네 총독을 참한 후에 네 나라에 쳐들어가 씨도 없이 하려했다」말하여 수십일의 고문 끝에 내준과 함께 전라도 기자도로 1년간 유배되셨다. 삼일운동 직후 곽종석, 김창숙 등 유림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한 파리장서에 유림대표 중 1인으로 서명하셨다. 또한 민족 대단결 항일투쟁을 표방한 대동단의 유림대표로 추대되어 대동단이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는데 민족대표 중 1인으로 서명하셨다. 1919년 4월에 임시정부를 위한 국민대회에 13도 대표 중 1인으로 참여하셨다가 종로서에 구금, 옥고를 치렀다. 그해 11월 대동단이 발각되자 포위망을 피해 동지들을 규합하고 1921년 5월경 2,000여원의 군자금을 모아 전달하는 등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1923년 8월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어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1묘역 243호에 안장되셨다.
내준공은 회천 선생의 차자로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호방하여 반상의 구별이 없고 상하간 교류가 넓었다. 부친 순국 후 형님과 의병봉기 모의시 자금과 의사를 모으던 중 체포되어 유배형을 당하였고 임정수립 국민대회 참가, 상해임정 군자금 모집 등 독립
활동을 하셨으나 수차례의 투옥과 혹형으로 병이 깊어 1943년 돌아가셨다. 반도내 대표적 항일인사인 형님을 도와 실무적 활동을 하심으로 그 행적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으나 고종황제 승하 후 평생을 백립과 백의를 입고 지내는 등 그 절의와 강직함이 크셨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한국독립운동사 및 독립운동자료집 고등경찰요사, 명치백년사총서, 충곡서원지, 논산지사에 빛나고 있다. 값진 회천 선생 일가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이 비를 세우고 그 공적을 높이 받들어 추모한다.

2010년 6월 익안대군 20대손 대전 이희(희)영 짓고 19대손 하대리 이창구 / 현손 이근효 교정
유족대표 이원효 이광효 이근효
전주이씨 익안대군파종회 고문 이성구
전주이씨 익안대군파 익평부원군 종회장 이석희
전주이씨 익안대군파 종회장 이영구
익안대군파 백파도정종회.어모장군 종회장 이춘구
건립추진위원장 익안대군파 어모장군종회.인의공종회 총무이사 이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