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병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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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산32-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1919 년 65 세 때 3.1운동에 가담해 열렬한 투쟁을 전개하다가 서울 적선동에서 체포되어 법정에서 굴하지 아니하고 민족의 대의를 떨쳤으며 일제의 만행을 큰소리로 꾸짖고 심리조차 거부하더니 1921 년 겨울 병으로 보석되어 고향에 돌아와 마침내 11월 17일 향년 67 세로 세상을 여의였다. 그러나 선생의 의기와 은 조국의 산천과 역사와 함께 길이 남아 우리들의 갈 길을 밝혀주실 것이다.
후학 문학박사 이은상 짓고 윤석오 쓰고 윤덕병 비석기증, 성재선생 기념사업회장 류재춘 세움
1977년 10월 일
충남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산32-1 묘소입구 성재 윤이병선생 사적비
성재 윤이병선생 사적비
성재 윤이병선생 사적비
일찍 조국의 국운이 기울어 갈적에 그 조국을 건지려 했고 다시 조국을 잃어버렸을적에 그 조국을 되찾기위해 자기 한몸의 영화 안락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다만 민족의 대의와 불굴의 기백으로 일제의 침략세력과 싸우며 그로 인해 귀양도 가고 무릇 19회의 옥고끝에 생명을 버린 순국선열이 계시니 성재 윤이병선생이 그 이시다.
본관은 파평이요 자는 계성이며 철종 6년 서기 1855년 11월 1일 논산군 구자곡면 왕암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덕행과 문무를 겸전하니 모두 선생을 일러 금지산 정기를 타고 난 분이라 일렀었다.
선생은 구국의 뜻을 품고 무과에 올랐으며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역당소탕을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듬해 42 세 때에 도리어 무고죄로 고군산도에 귀양갔다가 다시 풀려와 한성재판소 수반판사에 임명되어 모든 판결을 엄정하게 하므로 탐관호족도 숨을 죽였고 정의로서 국맥을 바로잡아야 할 것을 애타게 외쳤으며 경부철도 부설권이 일본에 이양되자 러시아는 경의선 철도 부설권을 요구하므로 선생은 통분함을 참지 못하고 일본과 러시아의 요구를 강력히 배격할 것과 간교한 매국도배를 무찌를 것과 재정, 양곡의 정책 등을 상소했었다. 1905 년 51세 때, 을사조약이 강제로 채결되자 국가의 위급을 상소하는 격문을 지어 전국에 살포했으며, 이듬해에 농상공부 형판과 평안도 관찰사에 연배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향리에 돌아와 민중을 교도하려고 동아개진교육회를 창립하고 풍속 선도에 애쓰시다가 1907 년 봄에 다시 서울로 올라와 동우회를 창립하니 황실존중과 동양평화와 청년교육이 삼대강령이었고 수개월이 채 못되어 회원이 수천명에 달했다. 헤아 밀사사건에 이어 고종양위와 군대해산으로 국운이 어두워지자 동우회원들이 앞에 나서 일경과 싸운 끝에 선생은 회장으로서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54 세 정월 내란죄라는 평리원의 판결로 지도에 유배되었더니 2년이 지나 1910 년 망국후에 풀려나서도 불굴하는 독립정신의 고취로서 거듭거듭 영어의 몸이 되었고 다시 5~6 년후 광복의 뜻을 품고 북만주로 향하던 도중 북청에서 선조 문숙공의 현몽으로 결심을 굳혔으나 불행하게도 일본경찰에 체포돼 경성으로 옮겨와 갇혔다가 이른바 회유정책으로 1개월 뒤에 방면되었다.